구조조정 골든타임 놓친 일본… "20년째 후유증"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조선·해운업 구조조정관련 당정협의에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오른쪽 다섯번째)과 김광림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오른쪽 여섯번째)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나란히 서 있다. /사진제공=뉴스1

조선·해운업종을 비롯한 국내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보다 신속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1990년대 과감한 구조조정에 실패한 일본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장기불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전철을 되밟아선 안된다는 게 골자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31일 발표한 '일본기업 구조조정 20년의 교훈' 보고서에서 "일본은 장기불황 초기에 구조조정을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해 부실한 기업과 산업이 확대되고 은행 부실문제가 심각해졌다"며 "구조조정을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진행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장활력을 높이는데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1990년 주식시장, 이듬해 부동산 시장에서 연속적으로 버블이 붕괴된 이후 장기불황 국면에 진입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기업과 정부는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진 1992년에도 이를 통상적인 경기부진 사이클로 간주해 기존의 경영전략을 고수했다. 특히 제조업에서의 과잉설비, 과잉인력, 과잉채무 등 3대 리스크의 근본적 해결책을 뒤로 미룬채 원가절감, 경비삭감 등 통상적인 불황 대책에 치충했다.

당시 일본 금융권 관계자들은 기업 부실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노출되지 않도록 추가 지원을 지속해 부실채권 규모를 늘렸다. 최근 국내 국책은행들이 조선·해운 대기업들을 지원한 것과 비슷한 경로를 밟은 것이다.

경기불황이 이어지면서 점차 부실기업들이 늘어나고 이들을 지원했던 대형은행들의 경영도 악화됐다. 실제로 1997년 4대 증권사였던 야마이치증권이 폐업하고 1998년 시중은행인 훗카이도 타쿠쇼크은행은 파산에 이르렀다.

일본기업들은 이에 대응해 종신고용제, 연공서열제 등 고용시스템을 바꾸고 기존 고용인력을 감축하는 선택을 했다. 구조조정은 이런 방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완만하게 진행됐고 이로 인해 단기적인 경제충격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 전체적인 구조조정 기간이 길어지자 소비부진, 경제성장 부진을 벗어나기가 더 어렵게 됐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무리 경비를 감축해도 수익을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고 경기침체의 골은 더 깊어지게 됐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은행, 철강, 석유, 화학, 전기전자 등 주요산업에서 대기업간 통합을 단행했다. 이로 인해 20개 이상이었던 시중은행은 3대 대형 메가뱅크로 재편됐다. 5개 철강회사는 3개로, 14개였던 정유사는 3개사로 줄었다. 전자, 화학, 조선업종도 대규모로 재편됐다.

다만 산업별로 구조조정 성과에는 차이가 났다. 철강산업은 한국과 중국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고부가 신소재 개발에 주력해 영업실적이 개선됐으나 엘피다반도체로 통합된 메모리반도체 산업은 시너지효과를 내지 못하고 결국 2012년 미국 마이크론사에 매각됐다.

조선산업은 2000년대 초반 이후 구조조정을 강화해 경쟁사와의 합병과 전략적 제휴를 적극 추진했다. 일본 조선사들은 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의 설계 역량을 강화하고 연비성능을 높이는 차별화 전략을 강화했다.

이와 함께 이마바리사는 중소조선사를 잇달아 매수해 단가가 낮지만 상대적으로 수요 변동이 적은 벌크선 양산에 집중해 수익을 낸 뒤, 2015년 400억엔의 대규모 시설투자를 단행해 한국기업들이 주도해온 대형 컨테이너 선박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다만 여객선 사업에 집중한 미쓰비씨중공업은 노하우 부족으로 비용이 급증해 수주금액의 2배가 넘는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화학분야에서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IT(정보통신), 헬스케어 등 특수소재 분야에 집중한 클라레, 도레이 등의 전문 화학기업이 호조를 나타냈다.

일본의 산업 구조조정은 장기불황 돌입 후 15년 정도 지난 2000년대 중반에 본격화 됐을 정도로 서서히 진행됐다. 상시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산업재생법이 1999년 도입됐고 이후 제도 확대, 연장을 거쳐 2009년에 특별법으로 제정됐다.

보고서는 △구조조정의 장기화 △상향식(bottom up) 의사결정 구조 △사업통합 주도기업의 리더십 △성장전략이 없는 사업의 개량화 △사업 철수와 매각 지연 등을 일본 구조조정 실패 기업들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구조조정은 기존 조직이나 관행을 파괴하고 인력 문제도 수반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과제지만 단기에 한꺼번에 집중적으로 마무리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