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와 이별, 산자의 평화…예술이 된 '영산재'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지난 6일 열린 제28회 영산재가 열렸다. 영산재는 2500년 전 중인도의 옛 왕국 '마갈타국'에 있는 영취산에서 석가모니가 벌인 설법을 재현하는 제사로, 현재는 영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의 의미도 담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열린 제28회 영산재에 내걸린 대형 '영산회상도'. /사진=김유진 기자

중인도에 위치한 옛 왕국인 마갈타국의 영취산(靈鷲山).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석가모니는 돌연 설법을 멈추고는 꽃을 하나 집어 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성스러운 소리들이 울려퍼지고 영취산에 모인 대중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신들은 감동했다. 오늘날 '영산회상'이라 불리는 장면이다.

2500년이라는 시간과 5000km라는 공간을 넘어 영취산에서의 설법이 한국에서도 열린다. 지난 6일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봉행된 '영산재'(靈山齋). 봉원사 대웅전 앞마당에 넓은 '법석'(불법을 펴는 자리)'이 펼쳐지고 그 위에는 대형 영산회상도가 내걸렸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나는, 긴 제례의 시작이었다.


무명과 미혹으로부터 벗어나라

영산재는 석가모니의 설법을 재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영혼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 이승을 떠나면 곧바로 다음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49일을 허공에서 떠돈다고 봤는데, 이 마지막 날에 지내는 '49제'를 올리는 방식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이 바로 '영산재'다.

제단의 정면에 내걸린 영산회상도 양쪽에는 오방색의 화려한 꽃들이 자리했다. 불자들은 끊임없이 제단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기원했다. 1년에 한 번 현충일에 정기적으로 열리는 영산재는 문화재청의 후원을 받아 치르는 국가무형문화재다. 올해로 28회째. 누군가의 49제는 아니나 영산재를 찾은 시민들의 태도만큼은 누군가의 극락행을 기원하는 것처럼 경건했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지난 6일 열린 제28회 영산재에서 형형색색으로 옷을 차려입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신앙의 대상을 절 밖에서 모셔오는 행렬의식인 '시련'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소리와 음악, 그리고 춤이 어우러지는 영산재가 시작됐다. 가곡·판소리와 함께 한국의 3대 성악으로 불리는 '범패'가 노승의 목소리로 울려퍼지자 악사들이 태징을 치고 태평소를 불며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범패는 '인도(梵)의 소리(唄)'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불교 이전인 브라만교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는 830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선사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 권5의 월명사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도 760년(경덕왕 19) 범패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현재 유일한 영산재 인간문화재인 구해스님(74)의 소리에 맞춰 작법(作法)이 진행됐다. 작법이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무용으로, 영산재에서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등을 볼 수 있었다. 몸짓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외적인 춤이라기보다는 심적 상태를 표현하는 내적인 춤에 가까운 만큼 정적이면서도 힘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불가의 춤이라 하면 '승무'를 떠올리기 마련. 그러나 승무는 불가의 전통 춤이 아닌, 1930년대 민속무용가인 한성준 선생이 만든 춤이다. 우리 민속춤의 정수를 담고 있는 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춤의 고운 자태의 기원에도 '영산재'는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지난 6일 열린 제28회 영산재에서 한 외국인이 눈을 감고 범패 소리를 듣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에서 지난 6일 열린 제28회 영산재 현장. /사진=김유진 기자

외국인도 공감하는 '인류 평화' 보편 가치 담아

거대한 괘불, 꽃 장식 등 시각적 예술부터 범패에 담긴 문학과 악기 소리가 만들어내는 음악, 그리고 승려들이 선보이는 이승을 초월한 듯한 무용까지. 영산재는 다른 민속문화재가 그 가치를 따라오기 힘들 정도의 종합문화예술이다. 그런 가치를 인정해 2009년 유네스코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날 봉행 현장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참석해 경건한 표정으로 의식을 지켜봤다. 함께 찾은 한국인에게 설명을 듣거나, 조용히 눈을 감고 범패소리를 음미하기도 했다. 외국인들도 불교신자가 아닌 일반인도 영산재에서 어떠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영산재의 의미 때문.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인간 세계의 모두가 진리를 깨달아 하나가 되어 다시 만나자는, '인류의 평화'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산재보존회 회장인 선암스님은 "영산재는 현대인들이 국가나 종교를 초월해 지향하는 '인류평화'와도 일맥상통한다"며 "온 인류가 추구하는 본질적인 인간의 가치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