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느릿느릿, 풍경을 놓다

천천히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사내가 있다. 금방 날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 도무지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한술 더 떠, 나무 그늘에 들어 눈을 감고 좌선을 한다. 그는 바로 장철문 시인(1966년~ )이다.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장철문의 시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의 수행법이라 일컬어지는 ‘위파사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위파사나는 자기 육감(六感) 속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을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나’와 나를 관찰하는 ‘나’를 동시에 관찰하는 것이다.

네 번째 시집 ‘비유의 바깥’에는 이러한 수행법과 사유가 반영된 시편들이 다수 수록돼 있다. 그렇다보니 불교의 색채가 짙을 수밖에 없다. ‘강가 강에 와서’, ‘나무’, ‘소가 죽었다’, ‘수자타 마을에 가서’, ‘다시 바라나시에 와서’ 등의 시는 인도 불교 성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장철문의 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자연도 주요 소재인데, 여간해서는 자연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시 ‘창을 함께 닫다’에서 보듯, 시인은 창밖의 달을 보면서 “달이 참 좋다”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혼자 보기 아까워 딸아이를 부른다.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시인의 마음은 “이런 건 왜 꼭/ 누구한테 말하고 싶어지는 걸까?”라는 시구에 잘 반영돼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차린 ‘아이’가 고개를 내밀고 달을 구경하는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딸아이를 부르는 아버지의 마음도, 달을 구경하는 딸의 자세도 ‘엉거주춤’하다. 이 ‘엉거주춤’에는 제멋대로 휘어져 선산을 지키는 소나무처럼 자연스럽고, 선한 마음결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 중에는 하루만 살고 가는 것들
그냥
아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가는 것들
사는 게 그저
알에서 무덤으로 이사 가는 것인
그런 것들
불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들며
어지럽게 원을 그리는,
도무지 뭐랄 수도 없는 것들

이 마음에는 한순간 왔다 가는 것들
너무 빨라서
사라지고 난 뒤에야 그 몸을 알리는 것들
안팎의 경계에서
그저 잉잉거리다 마는 것들
스러진 뒤에야
그 잔상이나 남기고 가는

그마저 거두어지는

- ‘갓등 아래’ 전문

어찌 보면, 장철문 시의 핵심은 ‘경계’라는 말에 들어있다. 시 ‘창을 함께 닫다’에서도 달과 경계를 짓는 창이 있지만 안이라 해서 달이 안 보이는 건 아니다. 집안에 비친 달빛 또한 고고하다. 안과 바깥의 경계가 무의미한 것이다. 집 밖의 달이나 “오월의 산빛”(이하 ‘오월 낙엽’), “파도와 비애”가 “비유의 바깥에 있”든 안에 있든 상관이 없다.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 시가 ‘갓등 아래’다. “하루만 살고 가는 것들”이나 “아하, 이게 사는 거구나 하고 가는 것들”은 갓등 아래에서 “불빛과 어둠의 경계를 넘나”든다. 여기서 겉으로 드러난 것은 ‘불빛과 어둠’이지만 내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불빛이 삶이라면 어둠은 죽음이다. 삶이 안이라면 죽음은 바깥에 가깝다.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넘나들 수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세계다. 삶이란 “알에서 무덤으로 이사 가는 것”이다. 알도, 무덤도 둥글다. 둥근 세상에서 시작해 둥근 세상으로 “이사 가는 것”은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윤회사상과 다르지 않다.

장철문의 시세계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사계절과 같고, 시 한편 한편은 흐르는 계곡물 같다. 담(潭)을 만나면 깊어지고 굽이굽이 휘어지면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이 시집은 달을 구경하듯,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천천히 읽어야 제 맛이다. 다 읽은 뒤에는 “이 시집 참 좋다”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지는, 그런….

◇ 비유의 바깥=장철문/ 문학동네/ 112쪽/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