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인생의 비극과 절망이 운명인 것처럼

머니투데이

공광규 시인

려원 시인은 2015년 ‘시와표현’으로 등단한 신인이다. ‘꽃들이 꺼지는 순간'은 그의 첫 시집이다.

새는 제 허공을 잃어버렸다

- 계집애가 가방끈만 길면 뭐해!
아버지 말씀이 내 귀때기를 때렸다

나는 나와 수십장의 상장을
감나무 밑에 묻었다
여러 날 귀때기에서 바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미역을 잡히는 대로 뜯었다
저울의 무게가 올라 갈수록 몸에 피어오르던
소금꽃

퐁퐁을 풀어 수십 번 미역냄새를 씻어도
내 몸에서 절망 냄새가 났다

불쏘시개로 던져놓은 오빠 책을 감추어두고
오빠의 지문 위에 내 검지를 꾹꾹 눌렀다

사각사각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깃털이 돋기 시작했다

― ‘윙컷’

‘윙컷’은 앵무새를 키울 때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날개를 자르는 것을 말한다. 앵무새를 새장에서 꺼냈을 때 날아다니다가 거울이나 벽에 부딪힐까봐 새의 안전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새의 본질인 날아다니는 자유를 빼앗는 행위다.

화자는 자신을 새에 비유하고 있다. 새는 ‘윙컷’이 되면서 자신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인 허공을 잃어버리게 된다. 화자의 아버지는 계집애가 가방끈만 길면 뭐하느냐고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한다. 여자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전시대적 관습이나 집안의 경제적 사정으로 윙컷이 된 것이다. 윙컷을 당하여 날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절망한다. 그러다가 불쏘시개로 버려진 오빠의 책을 감춰두고 몰래 넘기면서 윙컷 된 곳에서 깃털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허공을 나는 새의 본성을 찾게 된 것이다. 자아를 찾으면서 자아가 살아난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뚝 떨어져요
알맹이를 내놓은 껍질들을 땅에 버려요
식탁 위 이혼서류가
바지락 국물에 젖어가고 있어요
썰물은 잘 찢어져요
해안선은 두 세계가 찢어진 곳이에요
서류는 이미 만조로 깊고 외딴 섬처럼
서명란의 빈칸이 둥둥 떠다녀요

- ‘바지락 끓이는 여자’ 전문

요즘 남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바지락을 끓이고 있다. 남편과의 관계가 어떻든 식구들을 챙기고 나도 밥은 먹어야 한다. 식탁 위에는 이혼서류가 있다. 이혼을 결심한 모양이다. 그런데 바지락 국물이 넘쳐서 이혼서류를 적시고 있다. 이혼서류가 젖어서 찢어지니 이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시집의 편편이 인물사와 가족사, 사회사와 개인사를 보편적 인간사로 치환하는 마력을 가진 시인이다.

수시로 찾아오는 인생의 비극과 절망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꽃들이 꺼지는 순간 =려원 지음/시와표현/136쪽/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