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문화가 있는 날’…‘콘텐츠’보다 ‘홍보’에 주력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이 영업인에게 가장 바쁜 날인데, 문화를 즐기라니요? 영업하는 모든 직장인이 월말 정산에 바쁜데 ‘문화가 있는 날’이 가당하기나 하나요?”(서울 강남구 삼성 계열 A회사 다니는 30대 김모씨)

“왜 주중에 ‘문화가 있는 날’ 혜택을 주는지 모르겠어요. 주말에 문화시설이나 공연 등을 반값으로 해준다면 충분히 즐길텐데. 우리에겐 그림의 떡인 셈이죠.”(강원도 B공기업에 다니는 20대 이모씨)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열리는 ‘문화가 있는 날’이 시행 3년째를 맞고 있지만, 국민이 느끼는 만족도는 정부의 열렬한 홍보성 멘트와 차이가 컸다. 그간 수많은 예술단체의 참여와 다양한 콘텐츠 확보에도 국민의 실질적 참여와 체감 만족도는 크게 낮다는 얘기다.

한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C씨는 “공무원이 만든 제도에 공무원만 즐기는 문화가 아니냐”며 “일반 기업에선 쉽게 꿈꾸기 힘든 생색내기용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참여 예술기관 2000여개 ‘양적 팽창’…평일 관객보다 저조한 실적 ‘실속에 의문’


영화관, 미술관, 박물관, 문화재 등 전국의 주요 문화 시설을 할인 또는 무료입장 등의 혜택으로 즐기는 문화가 있는 날은 2014년 첫 시행 이후 지금까지 모두 29회 시행됐다. 참여 국·공립 및 민간 문화예술시설은 5월 현재 2088개고, 학계 및 기업도 100곳 이상 참여하고 있다.

그럴듯한 양과 다양성을 앞세운 문화가 있는 날의 실속은 어떨까. 일반인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는 영화 관람료의 경우 정부는 오후 5시~9시 사이 영화를 9000원에서 5000원으로 할인해 주고 있다. 하지만 문화가 있는 날에 애써 영화관을 찾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의 주요 영화나 다양성 영화는 오후 9시 이후에 몰려있기 때문. 오후 7시에 간신히 영화 할인 혜택을 봐도 저녁을 굶어야 하는 문제도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공립 문화 시설의 이용률은 어떨까. 지난 4월 한 달 간 이용객 집계를 바탕으로 마지막 주 수요일에 열리는 문화가 있는 날과 일반 수요일의 관람객 수를 비교했다.

문화가 있는 날에 찾은 예술의전당 관람객은 2866명으로 수요일(문화가 있는 날 제외한 평일) 평균 2610명보다 250여 명 정도 많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1만 570명으로, 수요일 평균 7989명보다 2500여 명이 많은 급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장(400여 명 감소)이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800명 감소) 등 몇몇 시설은 평균보다 낮아 ‘문화가 있는 날’의 대대적 홍보만큼 이 제도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IT업체에 다니는 20대 D씨는 “평소 주변 사람들이 ‘문화가 있는 날’을 ‘한가한 사람들이 돈 안 내고 문화를 즐기는 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며 “아직 직장인에게 도움되는 정책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2년간 260억원 ‘단체 활동’ 등 공공재로…국민 절반 알고 참여율은 그중 38%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가 있는 날’에 지난해와 올해 각각 130억 원씩 모두 260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예산의 상당수는 ‘문화광장’(25억원, 2015) ‘생활문화동호회’(20억원, 2015) ‘지역거점 특화프로그램’(30억원, 2016), ‘청춘마이크’(16억원, 2016) 등 주로 ‘단체활동’에 쓰였다.

문화가 있는 날의 자발적 참여의 제1 조건으로 여겨지는 ‘콘텐츠의 질’보다 모두를 아우르는 ‘공공재’ 성격으로 쓰이다 보니, 생색내기용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실제 문체부가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전국 2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문화가 있는 날’을 알고 있는 국민은 57.6%로 절반을 넘겼지만, 참여비율은 그중 38.1%에 그쳤다. 이는 보고 싶게 만드는 콘텐츠보다 제도를 알리는 홍보에만 주력한 결과로 풀이된다.

문체부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바라는 것도 각종 행사로 ‘문화가 있는 날’을 띄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어지는 것”이라며 “한해 130억 원의 예산을 계속 쏟아 붓고 각종 문화기관이 무료나 대폭 할인하는 식으로 이어간다면 오래 못 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공급자 중심의 참여만 늘고 공무원은 ‘의무 사항’…수요자는 여전히 ‘소외’

문체부는 최근 ‘문화기본법 개정안’을 통해 ‘문화가 있는 날’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강제 조항은 아니지만, 지자체나 기업 등에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안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셈이다.

하지만 참여의 본질이 시민이 아닌 기업, 지역 주민이 아닌 지자체 같은 공급자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여전히 수요자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서울 중구 정동극장에서 열린 '문화가 있는 날'에서 선보인 청춘마이크 발대식. 이 자리에서 청년예술가 88팀 150여 명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삼성 에버랜드와 업무협약을 맺는 등 매달 새로운 공급자의 참여를 높이지만, 정작 직원들은 ‘문화가 있는 날’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여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업무 협약을 맺을 때 콘텐츠 할인 등 공급자 정책과 ‘직원 참여 독려’ 부분에 대한 얘기를 듣지만 직원의 참여가 쉬운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참여비율이 높은 공무원에게 ‘문화가 있는 날’은 ‘자발적 참여’가 아닌 ‘강제적 의무’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문체부는 ‘조기 퇴근제’를 두 달째 시행한 결과 전체 직원의 60% 후반대 참여비율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선 공무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문체부 산하기관에서 근무하는 30대 F씨는 “문체부 내 모든 공공기관에 공문이 내려와서 2시간씩 일찍 퇴근하는데, 그 주에 퇴근 시간만큼 보충해야 하니 의무로 둔갑한 느낌”이라며 “일찍 퇴근해도 문화를 제대로 즐길만한 콘텐츠가 부족하고 할인해도 비싸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이형호 문체부 문화정책관은 “전체적으로 보면 지방의 문화 향유 기회가 적어 도시보다 지역에 더 신경 쓰고 알리는 게 시행 3년간의 과정이었다”며 “궁극적으로 홍보보다 콘텐츠 질을 내세우는 방안을 모색하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