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우리에게도 ‘1000년 다리’가 있다

티그리스 강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다리. 대부분 무너지고 교각만 몇 개 남았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티그리스 강 상류에 위치한 하산케이프는 8,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고대도시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싹을 틔운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로마, 아랍, 몽골, 오스만 투르크 등이 거쳐 가면서 남겨놓은 유산이 켜켜이 쌓여 있다. 10~20년 전까지 사람들이 거주했던 3,500여 개의 동굴 집도 있다.

하산케이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다리가 있다. 정확한 기록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1,000년 이상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통행을 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지만, 여전히 강물 속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은 교각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다리’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 다리는 여러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오랜 세월 아나톨리아 반도와 메소포타미아 간의 문화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 또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으로, 낙타를 몰고 동쪽에서 온 대상들이 이 다리를 건너서 멀리 이스탄불까지 갔다,


하산케이프에 가서 이 다리 앞에 섰을 때 맨 먼저 든 생각은 1,000년을 버텨온 구조물에 대한 경의였다. 하지만 크게 부럽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도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충북 진천의 세금천을 가로지르는 농다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 다리는 티그리스 강의 하산케이프 다리와 형태나 크기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랑할 만한 게 많다. 지금도 통행하는 다리라는 점 역시 그 중 하나다. 사실 농다리는 번듯해 보이는 다리는 아니다. 자연 그대로의 돌을 쌓아 교각을 삼고 상판을 얹었다. 큰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었다. 그러다 보니 듬성듬성 틈도 있고 밟는 대로 버석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대충 만든 다리는 아니다. 그랬다면 그 긴 세월동안 흐르는 물의 등쌀과 시간의 침식을 견뎠을 리가 없다.

충북 진천 세금천의 농다리. 멀리서 보면 지네가 꿈틀거리며 물을 건너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동양 최고(最古)의 다리라는 이름을 가진 농다리는, 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축조했다.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안으로 차곡차곡 들여쌓아 교각을 만들고, 크기가 다른 돌을 배합해서 서로 물리게 했다. 위로 갈수록 폭을 좁혀 빠른 유속을 견딜 수 있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타원형의 교각은 물살의 압력을 최대한 피하고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홍수 때면 물이 다리 위로 넘쳐흐르도록 수월교(水越橋) 형태로 만든 것도 장수의 비결이다. 지네가 물을 건너가는 것처럼 구불거리는 모양 역시 빠른 물살을 고려한 설계다.


이 다리는 과학적 축조기술 뿐 아니라 심오한 동양철학을 근거로 만들었다고 한다. 교각에서부터 상판까지 붉은색을 띤 자석(紫石)을 사용했는데, 이는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이라는 고서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본래는 별자리 28수에 따라 28칸의 수문을 만들었으나 언제부터인가 4칸이 소실되고 24칸만 남아 있던 것을 지난 2008년 4칸을 복원해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농다리가 있는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중리)마을은 상산 임씨 집성촌이다. 고려 때 최씨 무신정권의 뒤를 이어 권세를 잡았던 임연(林衍·?~1270)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농다리도 임연이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다리의 축조에 얽힌 전설도 임연과 관련된 것이 많다.

임연은 매일 아침 세금천에 나와 세수를 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건너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를 건너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자초지종을 물었다. 여인은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급하게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정황을 딱하게 여긴 임연은 용마를 타고 돌을 실어 날라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았다. 용마는 너무 힘들어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는데, 그때 떨어진 돌이 용바위라고 한다. 전설이나 배경을 알고 가면 여행은 더욱 풍성해진다.

나는 가끔 이 다리를 찾아간다. 엉성한 것처럼 보이는 돌다리가 1,000년의 세월을 버텨왔다는 사실에 늘 감탄한다. 그 정도 시간이면 쇠인들 삭아 내리지 않았을까. 선조들의 지혜와, 또 남모르게 지키고 보수해왔을 이름 없는 이들의 노고를 생각한다. 세상을 지탱해온 진짜 역사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흙이나 돌 위에 쓰는 법이니. 다리를 건너며 세상사는 이치를 생각한다. 남들이 가진 것만 부러워할 게 아니다. 잘 살피고 의미를 되새겨 보면 내 주변, 내 안에도 자랑할 만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