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모성의 색, 모성의 힘으로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한 안명옥 시인(1964년~ )의 네 번째 시집 ‘뜨거운 자작나무 숲’은 솔직 담백하다. 도무지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상처 많은 마음의 그늘을 그대로 드러내 더 아프다. 하지만 시인은 울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열악한 생활환경과 삶의 아픔을 시적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서사시집 ‘소서노’나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에서 보여준 강인한 여성성을 이번 시집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특히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건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는 것이다. 나무의 그늘에 들어온 모든 것을 품어주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들을 위하여 “뜨거운 냄비를 덥석 집어 올”(이하 ‘모과’)려 상을 차리는 것이다.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사이 마음에 “좋은 길”이 들어서고, “향기가 더 진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모성(母性)이다.

박새 한 마리 비에 흠뻑 적은 채 먹이를 찾고 있다
양쪽 날개를 가끔씩 털어보지만
날개는 자꾸 밑으로 처진다

애비 없는 자식 만들지 않으려고 견뎠어

땅바닥에 추락하여 울먹이는 박새 한 마리
다치고 상한 날개 위로
두려움이 덮치고
어둠을 우려낸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검다는 건 시작이라는 것
검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세상의 모든 감정을 섞은 색이 검은 색이라는 것

바닥에 넘어지면 바닥을 짚고 일어서듯
바닥을 쳤으니
이젠 날아오를 일만 남았나

-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전문

비가 내리는데 박새 한 마리가 새끼들에게 먹일 모이를 찾고 있다. 흠뻑 비에 젖은 날개를 털어보지만 날개는 자꾸만 아래로 처진다. “다치고 상한 날개”(이하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로 먹이를 구하려 밖으로 나온 것은 “애비 없는 자식 만들지 않”으려는 모성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어둠을 우려낸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극한 상황까지 내몰린 순간 시인은 깨닫는다. “검다는 건 시작이라는 것/ 검다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라는 걸. 끝이 안 보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은, 다시 생각해보면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바닥과 다르지 않다. 이제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모성의 힘이다.

검정은 또한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의 원초적인 색이다. “세상의 모든 감정을 섞은 색”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가진 적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색이다. 오랜 갈등을 중화시켜주는, 그것은 모성의 색이다.

어둠은 포근해서 좋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뜨거운 짐승처럼 웅크린
자작나무 숲이어서 오래 걷는다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
젖어서 더 활활 타 오른다지
축축해진 길바닥에 눕는 달

어둠의 자식들일수록 눈빛이 살아 있다

- ‘자작나무 숲’ 전문

검정에서 다시 시작한 삶이므로 “어둠은 포근해서 좋”(‘자작나무 숲’)은 건 당연하다.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지만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난다. 하여 시인은 “달이 다시 돌아왔다”(시인의 말)고 짧고 강렬하게 말한다. 내 스스로 빛나지는 않지만 어둠이 바탕이 되는 순간 그 존재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달이다. 이는 “추운 곳에서 자라는 습성을 가진 자작나무”가 “젖어서 더 활활 타 오”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달과 자작나무의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딴”(이하 ‘발칸산맥의 장미’) 발칸산맥의 장미 향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다.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에 가장 강렬한 향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시인은 발칸산맥 장미처럼 “내가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위대해졌다”고 당당하게 노래한다.

시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에서 보듯, 바닥을 친 삶이므로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다. “이젠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소서노처럼 시인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은 고스란히 시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 뜨거운 자작나무 숲=안명옥 지음. 리토피아 펴냄 128쪽/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