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누명에 파탄난 인생…책임자는 없었다

(서울=뉴스1) 김태헌 기자 =

간첩누명 피해자 안덕영씨. /뉴스1 DB.

지난 13일 서울동부지법 형사8단독 이은빈 판사는 안덕영씨(52)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배지만씨(가명·54)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배씨는 서울대 학군단(ROTC) 동기 카톡방에 "안덕영은 북한과 김부자(정일·정은)를 존경한다고 얘기했다. 내게 조총련계 대남공작원 인사를 소개해줬다. 일본인 여자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올렸다. 법원은 이를 허위라고 인정했다.

안씨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번 판결에 앞서 그는 배씨의 허위 제보로 10여년을 간첩 누명을 쓴 채 파괴된 삶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가장 친했던 서울대 학군단 동기였던 배씨와의 악연은 2002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육군 소령으로 복무 중이던 배씨는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안씨를 기무사령부에 제보했고, 안씨는 2002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됐다가 2007년 3월에야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안씨의 삶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겨우 누명을 벗은 안씨를 배씨가 또다시 모함했다 재판에 넘겨져 유죄를 선고 받은 것이다. 대체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25일 뉴스1이 안씨를 만나 사연을 들어봤다.

◇"절친 제보로 간첩 누명…뚜렷한 증거도 없는 엉터리 수사였다"

"원한이요? 저희는 각별했어요. 지만이 둘째 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유골을 제가 직접 뿌렸을 정도로 친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1999년 당시 육군 소령으로 복무하던 배씨는 협성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던 안씨를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기무사령부에 제보했다. 당시 공동 제보한 기무사령부 소령(현 중령) 정승기씨(가명)와 배씨, 안씨 3명은 학군사관 동기다.

"체포됐을 때 집사람한테 '지만이랑 승기에게 어찌된 일인지 연락해서 물어보라'고 했어요. 그만큼 믿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를 제보한 게 그 두 사람이더군요."

안씨는 체포당하던 2002년 5월8일 어버이날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저녁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던 길, 갑자기 수사관 10여명이 나타나 머리에 두건을 씌우고 가족 앞에서 수갑을 채웠다. 당시 딸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회상하던 안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앉자마자 수사관이 김일성 유일사상과 통일연방제 교육에 대해 물었습니다. 없는 총기를 어디서 탈취해서 누굴 죽이려 했는지도 묻더군요. 황당했습니다. 몇 년간 저를 미행하며 만든 수사기록 수천장을 보여주는데 주요 증거는 하나도 없는 엉터리였습니다."

체포된 안씨는 곧바로 서울 홍제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당시 수사기관은 '매일 쓰던 일기를 일주일간 쓰지 않았으니 그동안 북한에 다녀온 게 틀림없다'며 허위 입북기록을 제시했다고 했다. 이같은 수사기록 대부분은 재판 과정에서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법원은 2002년 11월 1심에서 국가보안법위반과 군사기밀보호법위반, 군사시설보호법위반,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위반 등 4가지 혐의 모두 유죄를 인정하고 안씨에게 징역 1년6개월과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집행유예로 182일 만에 구치소 밖으로 나온 안씨가 만난 세상은 이전과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안씨의 무죄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문(왼쪽), 2심 판결에서 국가보안법 등 무죄를 선고한 주문(오른쪽). /뉴스1 DB.

◇송두리째 무너진 삶…'무죄' 후에도 제보자들 '뻣뻣'

안씨는 사회는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사실상 간첩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고 다니던 직장은 물론, 지인들로부터 모든 연락이 끊겼다. 출국금지도 당했다. 그때부터 경기 용인시에 있는 부모 집에 살면서 건설현장 막노동, 용접, 프리랜서 번역 등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풀 길이 없었다.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담배도 못했다. 여자 만날 정신도 없었으니 땀 흘리는 운동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용인에서 서울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한 지 벌써 15년째다."

2004년 5월 2심에서 국가보안법·국가기밀보호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언론과 시민단체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자신의 억울함을 조금은 세상이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배씨와 정씨는 완고했다. 재판 후 통화에서 정씨는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가 나온 것뿐이다. 여전히 네가 간첩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2007년 3월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하며 안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5년 동안 자신을 옭아맸던 간첩 누명을 완전히 벗는 순간, 안씨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와 형이 함께 재판에 참석했다. 무죄가 인정됐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에 대한 보상금 910만원이 통장으로 입금됐다. 보기도 싫어 반은 변호사, 반은 이혼한 집사람에게 부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이후 어떤 사람도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보상을 해 준 일이 없다."

안씨는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자신을 간첩으로 제보했던 배씨·정씨를 무고죄로 고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 일로 너무 괴로웠고, 모든 걸 잊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재 안씨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다. 한 국내 여행사에서 일본 여행 상품을 개발해 일하고 있다. 올해 말쯤엔 여행사를 차려 독립할 생각이다. 2심 이후 출국금지가 풀리면서 일본 등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여행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마주하게 만든 기자를 원망할 줄 알았지만 그는 헤어지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 일을 꼭 제대로 알려 저와 같은 억울한 사람이 다시 없도록 해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무죄 선고 후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제보자들의 사과는 없다. 지난 15일 배씨는 서울동부지법에 명예훼손에 대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장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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