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반역, 만복사저포기에서 꿈 꾼 것은?

정각 저녁 7시. 무대의 불은 꺼지고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깊은 산사(山寺), 만복사(萬福寺)에서 오는 '만 가지 복 비는' 소리다.


중복(中伏) 전날의 찜통 무더위라서 관객이 늦는 것을 감안, 시작이 조금 늦어질 듯도 한데 예외가 없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 것이고, 무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공연 시간에 늦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젊은이의 거리로 각광받고 있는 서울 홍대 앞에 있는 ‘더 스텀프(The Stump) 극장’에서 지난 22일부터 절찬리에 공연 중인 ‘사랑애몽’ 얘기다. ‘사랑애몽’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쓴 첫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중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현대식 창극으로 재창작해 만든 것.

'만복사저포기'는 인간인 양생(梁生)과 죽은 원혼인 아름다운 여인(꽃분이)의 시공간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를 다룬 명혼소설(冥婚小說). 가난하고 뒷줄(백그라운드)도 없지만 글 줄 꽤나 읽은 착한 시골 선비인 양생은 노총각이지만 결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흙 수저’인 그에게 시집 올 규수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희망도 갖지 못하는 그는 음력 3월24일, 만복사로 소원 빌러 갔다. 절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절 대웅전 부처에게 빌면 만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날 만복사를 찾아 비는 게 당시 유행이었다.


양생은 이날 대웅전 부처에게 기도하면서 내기를 한다. 나무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 자기가 이기면 배필(配匹)을 데려와 달라는 저포(樗蒲) 놀이다. 그래서 이 단편소설의 제목이 ‘만복사저포기’이다. 게임에서 이긴 양생은 아리따운 여인, 꽃분이을 만나 3일 동안 깊은 사랑을 나누고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는다.

하지만 “예쁜 꽃은 항상 피어 있는 게 아니고(好花不常開) 멋진 풍경도 오래 가지 않는다(好景不常在)”는 게 자연의 법칙이듯, 좋은 일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好事不常久)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비극 중 하나다.

양생이 목숨 걸고 사랑에 빠진 꽃분이는 왜적의 침입을 받아 능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많은 귀신(鬼神)이었다. 귀신은 오래 머물 수 없는 법, 인간 세계에서 3년에 해당되는 삼일을 꿈결처럼 보낸 뒤 꽃분이는 돌아올 수 없는 저 세계로 떠난다.

“백년가약을 맺은 약속을 어기고 어떻게 그리 허망하게 떠나가느냐”는 양생의 하소연에 꽃분이는 “당신의 진실한 사랑 덕분으로 먼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나게 돼 기쁘다”며 “인연을 끈을 놓지 말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며 길을 떠난다.

유불선(儒彿仙)의 동양 가치관을 모두 담고서 서정과 낭만이 관통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복사저포기’를 ‘현대식 마당극’으로 재창조한 ‘사랑애몽’. 사랑애몽은 출연자들을 가(歌) 무(舞) 악(樂) 희(戱)로 의인화해 봉산탈춤. 판소리와 서도소리. 굿 전통춤과 창작무용 및 발라드풍의 음악 등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정각 7시에 어김없이 시작해 8시10분에 끝날 때까지 70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몰입된다. 때로는 세태를 풍자(諷刺)하는 해학(諧謔)으로 웃고, 때로는 양생과 꽃분이의 첫 날 밤 사랑이야기로 손에 땀을 쥐고, 때로는 가(歌) 무(舞) 악(樂) 희(戱)로 등장하며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넋두리에 가슴 아파하는 동안 시간 가는 것은 딴 세상이다.

사랑애몽을 기획한 극단 '거목'의 조윤서 대표는 “교육적 가치가 충분하고 문화적 재해석이 가능해 우리 고유의 다양한 표현이 한 무대에서 어우러질 작품으로 만복사저포기를 선택했다”며 “사랑도 해보지 못한 채 죽어 귀신이 된 여인과 배필을 그리워하는 총각 양생의 그리움을 한 서린 노래로 아리게, 그 둘의 만남은 한판 굿으로 신명나게, 그들의 사랑은 눈부신 춤으로 그리고 아픈 이별은 서러운 제(祭)로 가슴 치게 했다”고 밝혔다.

600년 만에 ‘현대식 마당극’으로 되살아난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의 감동을 시로 써서 느낌을 함께 해본다.


'사랑애몽-만복사저포기'

꿈속의 사랑은 반역이다

돈과 뒷줄 없고 착하되 책 줄 읽은
고지식한 노총각 시골 선비 양생(梁生)과
왜놈의 겁탈에 나라와 집안의 보호받지 못하고
꽃도 피워보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 끊은
아리따운 대가 집 아가씨 꽃분이,

시대와 가문의 질곡에 묶여
온전한 삶 살지 못하고
한탄만 하는 괴로운 운명을 가르려
매월당(梅月堂),
만복사 부처의 가피를 빌어
반역 꿈 꾼 거겠지?

반역의 꿈,
한문과 성리학 질곡에 매여
퀘퀘한 책장 속에 갇혀 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리 듣고
씻김굿으로
판소리로
듣거나 말거나 한 넋두리로
가무악희(歌舞樂戱)로

형식 의식 모두 깨고
오로지 러브 스토리로
21세기에 거듭 깨어나
600년 전에 이루지 못한
반역을 꿈꾼다.

그때는
독자 없는 한문 소설로
지금은
공감대를 넓힌 퓨전 마당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