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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르침도 낮추어 보지 마라"

[동네북] <10>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저자의 눈으로 본 읽기의 역사적 고찰

동네북 머니투데이 이인선 동네북서평단 주부 |입력 : 2016.08.27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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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출판사가 공들여 만든 책이 회사로 옵니다. 급하게 읽고 소개하는 기자들의 서평만으로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속도와 구성에 구애받지 않고, 더 자세히 읽고 소개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서 모였습니다. 머니투데이 독자 서평단 ‘동네북’(Neighborhood Book). 가정주부부터 시인, 공학박사, 해외 거주 사업가까지. 직업과 거주의 경계를 두지 않고 머니투데이를 아끼는 16명의 독자께 출판사에서 온 책을 나눠 주고 함께 읽기 시작했습니다. 동네북 독자들이 쓰는 자유로운 형식의 서평 또는 독후감으로 또 다른 독자들을 만나려 합니다. 동네북 회원들의 글은 본지 온·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도 낮추어 보지 마라"
인류는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은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언제부터 책은 개인이 소장할 수 있는 물품이었을까?

위대한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한 때 사제서품을 받았던 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 '학교가 교육을 망친다' , '전문가가 무능력자를 만든다'란 저서를 통해서 세상에 담대한 질문을 던진 그가 12세기 수도사 후고가 쓴 '디다스칼리콘'이란 독서법에 관한 책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이며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손에 쏙 잡히는 이 책은, 책의 3분의 1이 주석임이 시사하듯 내용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총 7장의 핵심 텍스트가 있고 각 장마다 따로 주석이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새로운 방식의 읽기(수사식 읽기에서 학자식 읽기로 변화함)를 기념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저자가 "기록 테크놀로지의 영향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사회와 페이지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을 바라보고 싶다"고 했듯이,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발견은 사회에 어마어마한 변혁을 가져온다.

12세기에 수사들의 전용물이었던 '읽기'가 학자들의 손으로 넘어 온 것은 단연코 '필사혁명'에 힘입은 바가 크다.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 시대엔 모든 사람이 읽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 파리에 살던 후고는 수사 들 뿐 만이 아니라 당시 막 생겨난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배울 의무'를 '읽을 의무'로 정의한다.

"문명의 책이 담긴 책장이 수사의 페이지에서 학자의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읽는 사람에게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읽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페이지를 넘기기 전과 후가 다르다."

누구나 '읽고 쓰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에겐 당연한 '소리내지 않고 눈으로 읽기'가 당시엔 변혁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스콜라주의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흐름은 '읽기'가 신을 향한 기도에서 지식의 습득으로 넘어가는 시대로 접어들게 됨을 시사한다.

또 흥미로운 점의 하나는 종이의 전파에 대한 부분이다. 사실 15세기 인쇄술의 발명은 출판물의 중요한 재료인 종이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종이란 발명품은 실크로드를 타고 서구세계로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종이에 활자가 박힌 책 (오늘 날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책의 형태)이 양산되며 대학에 한정되었던 책이 일반대중에게도 보급됐고 이 또한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책의 많은 부분이 '디다스칼리콘'에 관한 해설이지만, 일리치는 서기(scriptor), 편찬자(compilator), 주석가(commentator) 그리고 저자(auctor)의 차이를 이 책에서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다. 이 책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그의 목소리는 그가 주석가의 눈이 아닌 저자의 눈으로 읽기의 역사를 파악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가르침도 낮추어 보지 마라"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300년 전인 12세기에 잉태된 '읽기'의 변화에 관해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활성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무엇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여러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책이다. 인용된 후고의 경구들을 음미하는 맛은 마치 포도송이를 따먹는 것과 같다.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에서 기쁨을 찾아라."
"어떤 가르침도 낮추어 보지 마라."


◇ 텍스트의 포도밭
=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현암사 펴냄. 335쪽/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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