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에 맞춰 빙글빙글 어깨 둥실, 농악에 홀리다

지난 12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농악 가운데 하나인 전북 임실군의 임실필봉농악 현장을 찾았다. 사진은 임실군 내 마을 농악 단체들이 굿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 /사진=김유진

2014년 11월 27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창의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농악은 공연자와 참여자들에게 공동체의 정체성을 부여해왔습니다. 농악의 등재는 인류의 창의성과 문화다양성에 이바지하고 국내외 다양한 공동체 간의 대화를 촉진할 것입니다."

국제회의장에 발표가 울려 퍼지는 순간. 한국의 농악을 대표해 위원회에 참석한 보유자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왕실이나 양반의 문화처럼 기록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요, 백성 중에서도 가장 하층민의 문화로 천대받았던 풀뿌리 문화인 농악이었다.


그랬던 농악이 프랑스 파리에서 만장일치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 "사실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농악은 변두리 문화로 치부돼왔는데, 세계의 학자들이 농악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양진성(50) 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 필봉농악 보유자의 말이다.

노릇노릇 파전에 막걸리 한 잔…'마을굿'의 매력

임실군 내 농악 단체들이 각자의 마을 이름을 적어 마을굿판에 가지고 나온 깃발. /사진=김유진 기자

필봉마을굿축제를 앞두고 농악대원들이 파전에 막걸리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유진 기자

지난 12일 농악 축제인 '필봉마을굿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전북 임실군 필봉농악문화촌을 찾았다. 산골짜기에 숨어있는 이 농악전수관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꽹과리 울리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이날 열리는 축제의 개막식을 위해 지난 1년 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임실군 농민들의 솜씨였다.

필봉마을굿축제는 1996년 시작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농악 축제다. 양 보유자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고 양순용 상쇠(1941~1995)를 기리기 위한 추모제로 시작해 20년째에 접어드는 이제는 전국의 농악인들이 모여드는 대규모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전국에 흩어져있는 농악 종목 6개 단체에 "굿판을 벌이자"고 연락해 한 곳에 모은 것이 시작이었다.


각자의 예술적 기준이 워낙 확고해, 계파 간에 종종 갈등이 발생하는 다른 무형문화재 종목과는 달랐다. 농악대 구성부터 연주 스타일, 리듬, 의상 등이 모두 달랐지만 이들은 서로를 만나자마자 잃은 형제를 되찾기라도 한듯 반가워했다. 강원 강릉시, 경기 평택시, 전북 익산시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농악대는 '농악'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녹아들어갔다.

2박3일간 이어지는 축제의 첫날인 이 날도 흥겨운 분위기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한켠에선 지글지글 파전 굽는 소리가 나고,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차려입은 농민들은 한켠에서 막걸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어이, 딸래미도 일 그만하고 여기 와서 막걸리나 한잔 혀!" 푸근한 인심에 이 곳을 찾은 모든 사람이 이날만큼은 마을 토박이가 된다.

굿판 속에서 피어나는 '흥'에 취하다

농악은 농사꾼들이 주인공인 축제지만 남녀노소,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가 즐긴 마을 축제이기도 했다. 양반, 아낙네, 대장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악대 옆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김유진 기자

임실군에 사는 사람들이 1년동안 연습한 농악 실력을 축제에서 뽐내고 있다. 마을의 놀이문화로 시작한 농악은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며 이제는 하나의 예술로 인정받는 문화재가 됐다. /사진=김유진 기자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이 '굿'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종교적 제의를 떠올린다. 그러나 무당굿처럼 주술적인 의미의 굿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 농악인들의 설명이다. '굿'이란 본래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일상적인 행위에서 '약간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으로, 그 성격에 따라 메굿·마당굿·고을굿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농악인들이 벌이는 놀이판을 '굿판'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굿 한 번 치세~!"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막걸리 한 잔에 두 볼이 빨개진 사람들이 자신의 악기를 챙기기 시작한다. 소고, 장구, 꽹과리 등 악기부터 시작해 부채 같은 소품까지 주섬주섬 챙긴 농민들은, 흰 도포자락 위에 곱게 묶은 오방색의 띠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깽깽깽깽~" 농악대를 이끄는 우두머리인 상쇠가 꽹과리를 울리자 각 마을의 이름을 적은 커다란 깃발을 든 사내들이 일렬로 행진을 시작한다. 축제의 첫 무대를 장식하게 된 이들은 임실군 내 각 마을을 대표하는 농악대였다. 양 보유자와 임실필봉농악 이수자들이 매일 밤 마을에 찾아가 농민들에게 악기를 쥐어주고 전수활동을 해 오랜 전통을 되살려낸 것.

상쇠의 뒤를 수십 명의 농악대원들이 따라가며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대형은 음악 소리가 고조될수록 모였다, 퍼졌다 하며 점점 속도가 빨라진다. 풍악에 맞춰 신나게 빙글빙글 춤을 추며 돌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어깨가 절로 들썩인다. 농악대의 옆에 고명처럼 붙어있는 양반, 아낙네, 대장군의 귀여운 막춤은 미소를 유발한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대. 농악이 가진 인간성 회복의 힘은, 오히려 공동체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듯했다. 매년 방학때마다 수만 명의 대학생이 필봉문화촌을 찾아 일주일씩 농악을 배우고 간다는 것이 그 증거다.

"농악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친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둥둥 울리는 북소리에 맞춰 심장이 뛸 때, 그 때가 가장 재미있어요." 아이돌 가수보다 농악대가 더 멋있다는, 어린 학생들의 재잘거림 속에서 농악이 지금까지 명맥이 끊기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