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퍼포먼스 벌인 80세 화가가 본 '현대사회'의 단면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김구림 작가(80)의 개인전 '삶과 죽음의 흔적'(Traces of Life and Death)에 전시된 설치 작품 '음양-배'. /사진=김유진 기자

바닥으로 떨어진 하늘 위에 흰 구름이 유유자적 지나간다. 하늘 위에는 좌초된 배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그 안에는 아이와 어른의 유골이 어지러이 놓여있다. 이 기이한 풍경은 평화로운 바람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관람자를 깊은 생각의 우물 안으로 초대한다.


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 작가(80)의 개인전 '삶과 죽음의 흔적'(Traces of Life and Death)에서 볼 수 있는 설치 작품 '음양-배'다. 김 작가의 전시는 30일부터 오는 10월16일까지 서울 종로구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김 작가는 지난 18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인 전위미술 '도(道)'(1970년)를 재현해 화제가 된 인물이다. 46년 전 한국미술협회전에서 진행한 누드 퍼포먼스를 그대로 재연한 것.

전시 시작을 하루 앞둔 29일 김구림 작가(80)가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김 작가는 "내 작품은 시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진=김유진 기자

지난 18일 오전 경기 과천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이전 30주년 기념 특별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에서 '도'(道)를 주제로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김구림 작가(80). /사진제공=뉴시스

처음 퍼포먼스를 선보일 때는 모두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작품이었지만, 46년 후 다시 선보인 이 작품은 일반인 관객에게도 이해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김 작가는 서로 다른 시대를 관통하며 인간이 가진 '시간성의 비밀'에 접근해가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이번 개인전에도 김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시간성의 비밀을 곳곳에 숨겨놓았다. 지하 전시장의 '음양-배'는 시리아 난민이 목숨을 걸고 보트를 타고 망명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았던 사건의 비극을 형상화했다. 1년 전 터키 해변에서 죽은 채 발견된 어린 아이, 아일란 쿠르디를 연상케 하는 작은 아이의 유골이 배 안에 담겨있다.


시리아 난민이라는 오늘날의 비극은 '하늘우물'이라는 고대의 모티브를 만나 하나의 작품이 된다. 고구려 벽화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늘우물'은 하늘 자체가 우물이며, 인간이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고 항변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현대사회와 인간의 추악한 단면이 하늘우물 안에 비치는 모습은 엄숙하고 비극적이다.

이렇게 김 작가의 작품은 현대사회의 직접적인 '사건' 혹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단면들을 담았다. "작품이 너무 쉬운 것 아니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김 작가는 "젊은 작가들 가운데 현대미술을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예술은 천상의 애매모호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했다.

김구림 작가의 '음양 16-s'(2016). /사진=김유진 기자

김구림 작가의 '음양 16-s'(2016). 남성 가발을 쓴 유골의 한쪽 손 위에 붉은 매니큐어가 칠해져있어 중성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사진=김유진 기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전시장에는 법, 섹스, 죽음 등 인간 삶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긴 작품들이 전시됐다. 유럽의 법관들이 쓸 법한 가발을 쓰고 수많은 여성의 사진이 담긴 욕조 안에 누워있는 유골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이다.

작은 방에 놓인 침대 위에 상영되는, 흐릿하게 편집된 남녀 간의 성관계 장면은 인간의 섹스인지 동물의 교미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침대 앞에 놓인 공자의 '논어'는 '섹스 만능주의' 시대를 향한 경종을 울린다.

그는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작품을 선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는 지금의 시대는 삶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는 잃어버린 채 본질적이지 못한 욕망들에 목을 매는 사회다. 김 작가는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면, 인간의 생각도 변한다"며 "전시가 보여주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지금의 세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