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직은" "결혼은" "연봉은"…추석을 망치는 말말말

누군가에게는 공포로 다가올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어떤 이들은 명절 기간 근무를 자처하고 나서고, 또 어떤 이는 없는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취업 준비생들도 연휴 기간 구직 활동을 쉴 의향(?)이 없어 보인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취업은 했냐", "연봉은 얼마냐", "결혼은 언제할거냐" 등의 질문에 억지웃음을 짓고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핑계가 있으면 다행이다. 마음을 다잡고 참석한 행사에서 안부 아닌 안부 인사를 받고 있는 동안 피해자(?)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한마디가 상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말. 연령대별로 명절날 가장 듣기 싫은 말을 알아봤다.


◇청소년기-"공부 잘하니?"…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예요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지 악기를 잘 다루는 지는 상관이 없어요."


고등학교 2학년인 박가은양(18)은 명절만 되면 고모가 오는지 확인한다. 고모는 성적과 대학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박양이 그림에 소질이 있어 학교 대표로 각종 대회에 나가도 하는 말은 "그림 그려서 어떻게 사냐"였다.

얄밉게도 고모의 아들은 학교에서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질문은 "반에서 몇등하니?", "영어 수학은 몇점이니?"뿐이었다. 그 뒤론 아들 자랑이 이어졌다.

지난해 추석에도 고모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역시나 한마디를 했다. "어릴 때는 참 예뻤는데…공부는 좀 잘하니?"


◇취준생-"너희 엄마 아빠도 힘드신데…"
내년 2월 졸업을 앞둔 박명식씨(27)는 지난 설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를 보는 친척들마다 "취업준비는 잘 돼가니", "학점은 몇이니?", "요즘은 다들 졸업 전에 취직한다며?" 등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학금은 탔니? 너희 엄마 아빠도 힘드신데 너라도 보탬이 돼야지"라는 말은 그를 순식간에 부끄럽게 만들었다.

당시만해도 "잘 돼 가고 있으니 걱정마시라"며 큰 소리를 쳐놨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 추석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올 초 졸업한 강명훈씨(29)는 이번 추석에 어디든 나가있을 계획이다. 지난 설, 엄마 아빠는 물론 친척들까지 그에게 "직장 고르는 눈이 너무 높은거 아니냐"며 훈수를 두는 통에 괴로웠기 때문이다. "얼른 취직해서 돈 벌고 결혼해야지", "언제 까지 시험만 보고 면접만 볼래"라는 말도 상처로 돌아왔다. 당시엔 그냥 웃고 넘겼지만 올해는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을 자신이 없다.

불과 몇년 전만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며 용돈을 쥐어주던 친척들이었는데 이제는 보고싶지 않은 손님들이 됐다.


◇2030-"연봉은 얼마나 받니? 결혼할 돈은 모아뒀니?"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가영씨(32)는 이번 추석 명절에 당직을 자처했다. 추석날 집에 있어봐야 "연봉은 얼마나 받냐", "만나는 사람은 있냐", "결혼은 언제할거냐" 등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들이 쏟아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교 동창 이름을 꺼내 "누구는 시집(장가) 잘갔다더라", "누구는 얼마 모았다던데 너는 계획은 있니" 등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보태면 금세 넉다운이 되고 만다. 김씨는 차라리 명절 동안 일을 하고 연휴 수당을 받는 편이 남는 장사라는 걸 깨달았다.


◇며느리-"아범 아범 아범…벌써 가니?"
"일찍 좀 오지. 그런데 아범 야윈 것 좀 봐라. 좀 챙겨줘야지. 어째 너만 살찐 것 같다." 3년차 며느리 김성희씨(35)는 시댁 현관문을 들어가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최근 몸짱이 되겠다며 다이어트를 한 남편을 두고 시어머니가 한소리를 한 것이었다.

서둘러 시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또 한말씀을 던지신다. "내 아들 고생한다." 오픈 마켓에서 저렴하게 산 가방을 보시고 하는 말씀이었다.

음식장만을 하는 동안에도 쉴 틈이 없었다. 친척들이 올 때마다 "과일 좀 깎아와라"해서 간식을 만들었고, "아이는 언제 낳을 거냐" 등 쏟아지는 질문에 웃음으로 답했다. 추석 당일 설거지까지 마치고 친정집에 가려고 인사를 드리자 시댁에선 마지막 한마디까지 던지신다. "벌써 가게? 조금만 더 있다가지."


◇사위…"자네만 아니었어도 우리딸…"
추석에 처가를 방문한 황승엽씨(34)는 내내 죄인이 된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앉은 그에게 장모님은 "내 친구 사위는 이런것도 해준다더라"며 휴대폰 속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모녀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마음 같아선 "저도 보내드릴게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당장 다음달에 갚아야 할 대출금을 생각하자 말이 쏙 들어갔다. 결국 제대로 답도 못하고 표정만 어두워졌다. 그의 표정을 본 장모님도 멋쩍어졌다.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딸이 결혼 전에 참 인기가 많았네. 집앞까지 찾아오고 그랬어. 자네 아니었으면 더 좋은 집에 시집 보냈을텐데…" 웃으며 듣던 중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