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지나면 자살보험금 안줘도 된다" 판결에도 보험사 고민

자살보험금 소멸시효 소송에서 "2년이 지나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보험사들의 속내는 더 복잡해졌다. 법적으로는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사라졌지만 금융감독원이 "약관대로 지급하지 않으면 행정제재를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 소비자 신뢰 회복도 따져봐야 한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약관변경명령권'을 발동해 자살을 재해로 해석한 잘못된 약관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의 계약이 280만개나 되는 만큼 보험이 도리어 자살을 방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승소했어도 속내 복잡한 생명보험사=자살보험금 소멸시효를 둘러싼 보험사, 보험계약자, 금감원의 공방은 지난 5월부터 약 4개월여 동안 지속됐다. 금감원이 소멸시효와 상관없이 약관대로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라고 지도한 가운데 보험사들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 결정하겠다"고 버텨왔다.

삼성생명, 교보생명, 한화생명 등 6개 대형 생보사는 소멸시효에 대한 대법원 판결 없이 금감원 지도대로 보험금을 전액 지급할 경우 경영진의 배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험사들은 또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 자살 통계를 보험료(원가)에 반영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폈다. 예상치 못한 거액의 자살보험금을 지급할 경우 손해율(받은 보험료 대비 나간 보험금)이 올라가고 결국은 다른 계약자의 보험료 인상으로 귀결된다는 얘기다. 이는 '상호부조' 성격의 보험 논리에도 맞지 않다는 것.


지난 2월말 기준으로 14개 생보사의 미지급 자살보험금은 총 2980억원인데 이중 소멸시효가 지난 금액은 81%인 2003억원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보험사들은 전체 금액의 81%가량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공식적으로 지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곳은 한 곳도 없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판결문을 받아 봐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그는 "금감원이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보험사에 행정제재를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라 보험사들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7개 생보사에 대해 순차적으로 현장점검을 진행 중이다. 대법원의 판결과는 별개로 보험업법에 따라 보험사와 임직원에 대해 행정제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르면 다음달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에 대해 제재 수위가 결정될 수 있다. 보험사 입장에선 당국과의 관계, 소비자 신뢰 회복 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방치된 280만 계약, 자살공화국 오명 벗으려면 =자살보험금 관련 법률적인 공방은 일단락됐지만 자살을 재해로 본 '살아있는 계약'에 대해 당국의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의 약관은 2010년에 수정됐지만 그 이전에 팔려나간 보험계약이 280만건이 넘는다.

예컨대 일반 사망보험금이 1억원이라면 자살하면 재해사망보험금 2억원까지 총 3억원을 받을 수 있는 계약이다. 이 280만건의 보험계약은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이나 암 등 중대 질환에 걸린 사람들의 자살을 방조할 수 있다는 우려를 사고 있다. '나 하나 죽어 가족 편하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자살을 감행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자살 사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표준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률은 한국이 25.8명으로 OECD 평균(12.0명)의 2배가 넘는다. 가뜩이나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는 터에 자살보험금까지 자살을 방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금융위원회가 보험업법 131조에 따라 '약관변경명령권'을 발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131조에는 '공익'이나 '보험계약자에게 불리한 내용'이 인정되면 청문을 거쳐 기초서류의 변경 또는 그 사용의 정지를 명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다만 약관변경명령권이 발동한 전례가 없다보니 금융당국이 소극적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살보험금으로 인해 자살이 더 늘어난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며 "여러 상황을 모니터링한 뒤 필요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