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시동거는 달동네 '백사마을'… 주민 갈등은 '현재진행형'

지난 17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 전경. /사진=김사무엘 기자

좁고 기다란 언덕길을 따라 쓰러질 듯한 집들이 죽 늘어섰다. 골목에는 지붕이 무너지고 벽에 금이 간 빈집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동네지만 이 곳엔 여전히 주민 수백명이 터를 잡고 살고 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다 지난해 초 사업에서 손을 뗐다.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후 1년여 간 재개발은 표류했고 주민 갈등은 극에 달했다. 최근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새로운 사업시행자로 나서면서 재개발은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개발 방식을 놓고 벌어지는 주민 갈등은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LH의 사업 포기로 재개발 표류

지난 17일 찾아가 본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은 197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집집마다 쌓여 있는 연탄재나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낡은 주택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다. 영락없는 달동네 풍경이었다.

중계동 104번지에 자리 잡고 있어 백사마을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967년 도심 개발에 의해 청계천, 양동, 창신동, 영등포 지역에서 강제 철거당한 철거민들이 이주해 와 형성한 마을이다.


집을 잃고 쫓겨난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라 애초에 좋은 집이 지어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거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재개발이 시급했지만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 개발이 쉽지 않았다.

@머니투데이 유정수 디자이너

재개발 필요성에 따라 2008년 그린벨트에서 해제됐다. 그린벨트 해제 지역은 난개발이나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저층 주택만 지을 수 있는 제1종일반주거지역 이하로 묶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서울시는 백사마을만은 예외적으로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제2종일반주거지역으로 용도를 높였다. 재개발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대신 일정 비율을 국민임대주택으로 확보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2009년 주택재개발 정비구역 지정으로 사업이 본격 시작됐다. 정비사업은 보통 토지소유자들이 조합을 꾸려 추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LH나 SH공사 같은 주택공사가 대행해 추진할 수도 있다. 백사마을 주민들은 후자를 택했다.

주민투표를 통해 LH가 재개발 사업시행자가 됐다. LH가 사업을 추진하는 와중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백사마을에 '보존형 개발' 방식을 제안했다. 기존의 전면철거식 재개발은 원주민들의 과도한 분담금과 낮은 재정착률 같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재개발 구역의 일부 저층주거지를 보존해 임대주택으로 공급하는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2012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결정으로 백사마을 면적 18만8900㎡ 가운데 22.6%인 4만2773㎡가 저층 주거지보전구역으로 지정됐다.

계획이 발표되자 백사마을 주민대표회의와 LH는 사업성이 없다며 반발했다. 주거지보전구역과 정비기반시설이 전체 재개발 면적의 45%를 차지하는 등 시의 토지수용계획이 과도하다는 이유다.

LH는 1년여 간 사업 타당성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도저히 사업성이 나올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LH의 조사에 따르면 사업성의 척도를 나타내는 비례율은 시의 계획대로 진행할 경우 50~70% 정도에 불과하다. 비례율은 100%가 넘어야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결국 LH는 지난해 1월 노원구에 사업 포기의사를 전달했다.

LH의 주장과는 달리 서울시는 백사마을 일부를 보존해 개발하더라도 사업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보전구역 지정으로 사업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한다. 임대아파트를 지어야 하는 부지면적만큼 보전구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분양면적에는 큰 손실이 없다는 것이다.

분양주택 부지는 기존 8만9557㎡에서 계획 변경 후 9만6587㎡로 늘었다. 분양 가구수도 기존 1461가구에서 1720가구로 증가해 사업성이 더 좋아졌다는 주장이다. 시가 추정하는 비례율은 약 88~106%다.

◇SH공사가 정비사업 재시동…주민 갈등은 '숙제'

표류하던 백사마을 재개발은 최근 재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울시의 보존방식을 반대하던 기존 주민대표회의가 주민투표로 해산되고 지난해 말 새 주민대표회의가 구성됐다. 지난 10일에는 SH공사를 사업시행자로 지정해 달라는 주민 동의서가 노원구에 접수됐다.

토지소유자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주택공사를 정비사업 시행자로 지정할 수 있다. 노원구에 따르면 전체 토지소유자 994명 중 747명이 동의해 요건은 충족됐다. 주민대표회의와 SH공사는 이달 말쯤 재개발 사업 시행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예정이다.

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여전히 회의적인 반응이다. 과도한 추가분담금 우려와 주민갈등 때문이다.

지난 17일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 서울시의 '보존식 재개발'을 반대하는 내용의 알림문이 붙어있다. 서울시의 방식대로 재개발을 추진하면 분담금 3억원 이상을 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사진=김사무엘 기자

재개발 후 전용면적 84㎡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2억~3억원을 더 줘야 한다는 얘기가 돌면서 사업을 망설이는 주민이 늘었다. 주민 이모씨(76)는 "돈 없는 주민들은 대부분 쫓겨날 텐데 사업에 동의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도 들어서 시끄럽게 개발해서 아파트 사는 것 보다 그냥 살던 집에서 편히 사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LH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전 주민대표회의와 서울시 방안을 따르는 새 주민대표회의와의 갈등도 여전하다. 전 주민대표는 지난해 주민대표회의 해산 과정에서도 절차상 문제가 많다며 무효를 주장하고 있다. 서로 간의 명예훼손 등으로 법정 다툼도 벌이는 중이다.

한 주민은 "패가 갈려서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싸우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며 "다른 주민들도 혼란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가구수 늘려 사업성 높여…"재개발 속도 낼 것"

여러 난관에도 백사마을 재개발을 본궤도에 올리기 위한 작업은 진행 중이다. 노원구가 SH공사에 주민동의서를 전달하면 SH공사에서는 내부 투자심사와 이사회 의결을 거친다. 시의회까지 안건이 통과되면 SH공사가 백사마을 시행자로 지정된다.

시는 새 시행자 선정만 마치면 이후에는 사업 추진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사업성을 더 높이기 위해 분양가구수를 기존 1720가구에서 약 2000가구로 늘리는 정비계획 변경안도 준비하고 있다. 노원구 관계자는 "빠르면 내년 상반기에는 사업시행인가를 받고 2019년 이후에는 이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숙원사업인 백사마을 재개발이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