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정부 "北은 깡패 국가…대사관 폐쇄도 불사" 단교 시사

북한이 김정남 피살 사건에 대해 '공화국 공민의 불상사'로 규정한 23일 오후(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한 대사관을 찾은 카이룰 아즈완 하룬 말레이시아 여당 청년위원회 부위원장이 대사관 관계자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뉴스1

북한이 김정남 암살사건과 관련해 말레이시아 정부를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외교관계 단절까지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으로서는 우방이었던 말레이시아까지 잃게 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양국간 단교가 실제로 이뤄질 경우 북한에 우호적인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북한의 고립이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24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정부 관료들의 북한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 정부 고위관료들은 최근 한 목소리로 북한을 비판하고 나섰다.


지난 23일 히샤무딘 툰 후세인 말레이시아 국방부 장관은 "강철 북한 대사가 선을 넘고 있다"며 "그의 발언이 외교적으로도 부적절했다"고 평했다. 그는 이어 "말레이시아 경찰이 수사를 잘 진행하고 있으며 철저한 계획아래 빠른 속도로 용의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툭 세리 나즈리 아지즈 문화관광부 장관은 자국민에게 북한 여행 경계령을 내렸다. 그는 "북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있는 '깡패국가'다"라며 "국제법도 준수하지 않고 말레이시아 법도 무시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지난 22일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한 행사에서 자국이 북한의 적(한국)과 결탁해 김정남 사망을 정치쟁점화하고 있다는 강철 주 말레이시아 북한 대사의 주장에 "외교적으로 무례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에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강 대사는 김정남 암살 사건 발생 직후 말레이시아 경찰이 벌이는 수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북한대사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 용의자 2명 면담 요청도 무시했고 체포된 북한 용의자인 리정철(47)도 증거가 없다며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한술 더떠 이번 사건이 '남한이 조작한 음모'라며 책임을 회피하기까지 이르렀다.

말레이시아 내부에선 단순한 비판을 넘어 외교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북한이 말레이시아 정부에 사과는커녕 비판을 이어간다면 외교통상관계를 끊을 수 있다고 전했다. 가장 먼저 거론된 것은 강 대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강철 대사를 '외교상 기피 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해 말레이시아에서 추방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과 맺은 무비자 협정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상태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2003년 각국에 대사관을 열고 무비자 협정을 맺었다. 이에따라 북한 국적기인 고려항공이 평양-고려항공 직항도 개설해 운영했던 적도 있다. 추가적인 암살 위험이나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양국 무역까지 중단하는 등 단교해야 하는 요구도 나온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으로부터 철광석·아연 등을 수입하고 있고, 고무·팜오일 등을 수출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전략분석연구소 선임 애널리스트 샤흐리만 록먼은 현지 언론을 통해 "양국 무역 규모는 2300만 링깃으로 말레이시아 전체 무역액 1조5000억 링깃의 0.002%에 불과하며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와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북한의 고립은 점점 더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동남아 국가들이 등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지역 협의체인 아세안(ASEAN)은 매회 개최하는 아세안안보포럼(ARF)에 남북한을 동시에 초대해왔다. 특히 북한이 과거에도 미얀마 아웅산 테러 사건에 연루돼 있던 만큼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말레이시아의 반응에 따라 태도를 달리 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편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1973년 수교를 맺었다. 말레이시아는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동시에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로 지내는 몇 안되는 국가다. 이런 이유로 말레이시아가 북한과 미국이 비밀회담을 하는 중간지대 역할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