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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대물림 배척한 현대적 제약기업 창시자 '유일한'

[한국제약 120년을 이끈 사람들]2-①미국서 공부한 엘리트, 조국 '의료구휼' 투신

머니투데이 이창명 기자 |입력 : 2017.03.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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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한국 최초 신약은 1897년 한 궁중 관료에 의해 만들어졌다. 궁중비법을 토대로 만든 이 약은 '애민정신'에 뿌리를 뒀다. 애민정신은 올해로 120주년을 맞는 한국 제약산업의 키워드다. 오늘날 우리가 '제약주권'을 갖기까지 제약 선구자들의 피와 땀은 120년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들에게 진 빚이 작지 않다. 법고창신. 한국 제약사를 이끌어온 인물들의 발자취를 쫓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본다.
유일한 박사가 생전 집무하던 모습. /사진제공=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생전 집무하던 모습. /사진제공=유한양행
1920년대 이전까지 한국 제약시장은 일본 제약사들의 무대였다. 국내 제약회사들은 이렇다 할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아픈 서민들이 기껏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곤 한약방 정도였다.

그러나 1926년 유한양행이 설립되고 미국 선진 의약품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제약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전국 곳곳에 약이 보급되고 제약사들도 모양새를 갖춰간다. 이런 기반을 처음 닦은 주인공은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 그가 한국 제약산업에 남긴 발자취는 곧 한국 제약사(史)다.

창립 당시부터 1929년까지 유한양행 사옥으로 쓰인 덕원빌딩/사진제공=유한양행
창립 당시부터 1929년까지 유한양행 사옥으로 쓰인 덕원빌딩/사진제공=유한양행
◇서재필과 만남, 그리고 탄생한 '버들표' = 유일한 박사는 1895년 1월1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 유기연 선생 뜻에 따라 1904년 9살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현지에서 식품회사를 창업해 재력을 쌓았다.

미국에서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졌을 법 하지만 그의 시선은 조국을 향했다. 청년 유일한이 고국 땅을 밟은 건 31살 되던 1926년. 그는 귀국과 함께 유한양행을 세웠다.

유한양행 기업 심벌 '버들표'에 관한 에피소드. 유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과 조우한다. 서재필은 3·1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던 유일한은 단상에 올라 결의문을 읽을 정도로 서재필과 깊게 교류했다.

귀국 직전 유일한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서재필을 찾았다. 서재필은 유일한에게 지조를 지켜달라는 뜻에서 버드나무 목각을 선물했다. 이 목각에 새겨진 버드나무는 버들표의 모티브가 됐다.

설립 초기 유한양행은 제약회사라기보다는 무역회사에 가까웠다. 당시 척박한 환경에서는 약을 생산하기보다는 질 좋은 의약품을 수입해 파는 게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박사는 차를 몰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약을 팔았다.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는 나귀에 의약품을 싣고 갔다. 이때 유일한 박사는 위생적으로 취약한 농촌 현실을 체험했다.

초창기 안티푸라민(왼쪽 위)부터 최근까지 나온 다양한 안티푸라민 제품군./사진제공=유한양행
초창기 안티푸라민(왼쪽 위)부터 최근까지 나온 다양한 안티푸라민 제품군./사진제공=유한양행
◇우수 의약품 도입으로 현대 제약사 기틀 마련 = 직접 생산설비를 갖추고 가정 상비약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도 이 때부터다. 그렇게 탄생한 게 안티푸라민이다. 안티푸라민은 소염 진통에 효과가 있는 찜질 약으로 입소문을 탔다. 사용법도 간단하고 한 번 바르면 효력도 오래 가 불티나게 팔렸다.

안티푸라민 성공 이후 유일한 박사는 1934년 세계일주를 떠나 대형 제약사들과 잇달아 만났다. 국내에 필요한 약품이라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수입계약을 맺었다.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제약회사들로부터 수은제나 생물학적제제, 마취제 등을 수입하면서 유한양행은 현대 제약사의 기틀을 다졌다.

다수 민족기업이 그랬듯, 유한양행도 일제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41년 3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며 시작된 태평양전쟁에서 유한양행은 미국회사로 오해받고 세무조사 등에 시달렸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왔다는 게 이유였다.

일제 핍박은 유일한 박사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유 박사는 미국 중앙정보부(CIA) 전신인 미국 육군전략처(OSS)에서 활동하며 한국 내 일제 동향을 미국에 전달하게 된다. OSS는 한국과 중국에서 오는 정보를 분석했다. 본부가 한국 담당고문으로 유일한 박사를 지명하자 유 박사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재미한인들로 조직된 ‘자주 민병 한인부대’와도 교류했다. 부대는 훗날 ‘맹호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1942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인준을 받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유일한 박사의 독립운동 경력은 잘 알려지지 않다가 1971년 3월11일 숨을 거둔 이후 관련 기록들이 하나씩 확인되면서 재조명을 받았다. 그 공로로 1995년엔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를 받고 1996년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에서 열린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가운데).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이는 이 자리에선 전후 일본 문제를 논의했다. /사진제공=유한양행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에서 열린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가운데).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이는 이 자리에선 전후 일본 문제를 논의했다. /사진제공=유한양행

◇독단경영 경계… 친아들도 해임 = 오늘날 유한양행은 오너가 없다. 상대적으로 투명한 기업으로 인식된다. 유일한 박사의 대승적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유한양행 경영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사건은 세습경영 단절이다. 유일한 박사가 처음부터 가족경영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다. 유 박사의 친아들 유일선씨는 부사장 자리까지 앉았다.

그러나 유 박사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유 부사장의 독단적 경영방식을 우려한 나머지 1969년 열린 이사회에서 유일선씨를 부사장에서 해임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30일 유한양행 경영권을 공채 출신 조권순 사장에게 넘겼다.

창업자에서 2세, 3세로 자연스럽게 경영권이 대물림되는 국내 기업 풍토에서 유일한 창업주의 결단은 여전히 신선하다.

1957년 신입사원 공개 채용도 국내 제약사 중 처음으로 도입했다. 공채로 선발한 신입사원들을 위한 체계적인 사원교육도 새로운 시도였다. 이 때 도입한 인사 체계는 유한양행이 자랑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어졌다.

지금까지도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현재 1600여명 직원 중 유일한 박사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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