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일기가 인생을 바꿨어요"…내 마음 콕 찍는 '힐링 사진사'

#. 학자금 대출을 청산하던 날, 내 통장 잔고는 다시 0원이 되었다. 은행 직원은 정말 고생했다는 말로 위로를 건넸고 그 말에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엄마는 말했다. ‘미안해, 딸.’ 다시 울컥했다.

‘학자금 대출 청산하던 날’이라는 제목으로 블로그에 올라온 이 글은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코끝을 찡하게 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일기처럼 써 내려간 이 글을 120만명이 읽었다. 이 덕에 ‘2015년 가장 많이 읽은 네이버 포스트’로 뽑혔다. 글을 쓴 ‘엄지사진관’(필명·31·여)의 본업은 직장인이다. 때우듯 흘려보내는 일상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끄적이기 시작했다는 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줄 지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서른을 갓 넘긴 엄지사진관의 글에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도 그래서란다. 일기에는 직장 상사의 적나라한 문자 내용에서부터 사표를 내고 새로운 직장을 찾는 과정, 일상에서 느끼는 허탈함과 행복함을 여과 없이 적혀 있다. 간결한 문장과 행간에 그만의 내공이 느껴진다. 지하철 창문 너머를 찍은 평범한 사진도 그의 글과 어우러지면 가슴팍을 파고든다. 그의 사춘기 시절은 험난했다.

“여자 축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고등학교 때 국가대표전에서 떨어지고 나서 방황의 길을 걸었죠. 학교에 잘 가지도 않아 친구들이 없었어요. 왕따였죠.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대학 입시에는 합격했지만 선택한 과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그만뒀어요. 결국 4수를 했죠. 돌아보면 나만 겪는 특별한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라요.”

괴로웠던 순간은 자양분이 됐다. 엄지사진관이란 필명으로 일기를 쓰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6개월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 내가 이렇게 피해 다닐 건 아니지. 나가자’. 이불을 박차고 나와 용산에서 중고 카메라 한 대를 샀다. 거리를 쏘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도 썼다.


“좋아하는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게도 하루하루에 의미가 부여되더라고요. 지금의 감정을 기록해 두고 나중에 꺼내보면 ‘내가 왜 이때 이런 생각을 했지? 철이 없었다거나 용감했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재밌었어요. 모든 게 희한하게도 서로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입사 한 후 3년간 써내려간 일기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출판사의 권유로 그동안 써온 일기들을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2주 만에 2쇄를 찍고 인세로 직장인 초년생들과 함께 힐링 여행도 떠났다.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며 틈틈이 다녀온 여행 추억들을 이야기로 담아 새 책으로 낼 준비에 한창이다.

“일주일에 10통 정도의 이메일을 받아요. 그중엔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독자들도 있어요. 그럼 따로 만나 상담해줘요. 나와 솔직한 대화를 하고 싶어 쓰기 시작한 일기가 저를 많이 변하게 했네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듣게 되면서 대인 기피증은 사라졌고 성격도 예전보다 외향적으로 변했어요. 모든 하루가 특별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