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新문화인 보고서]③ ‘타인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유 , “내가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기준에 맞춘 삶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개척하는 신(新) 문화인 3명이 지난 20일 머니투데이 회의실에서 모여 각자 영위하는 자유의 삶과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왼쪽부터 '걸스로봇'의 이진주 대표, 연극·뮤지컬 연출 김태형 감독, 피규어 아티스트 이찬우 작가. /사진=임성균 기자

타자의 시선에서 끈기와 열정의 미덕으로 무심코 살았던 이들이 어느 날 눈을 떴다. ‘불행한 걸 아는데, 왜 행복한 척해야 하나’를 깨닫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남들 평판에 이끌린 삶이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나서야, 이들은 비로소 느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어쩌면 식상하고 뻔한 교과서 같은 해답을 한참 ‘어른’이 된 후 찾은 늦깎이들은 포화 경쟁 시대와 타자의 시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신(新) 문화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새로 태어났다.

어떤 이에겐 ‘돈키호테’형으로 또 어떤 이는 ‘노마드’나 ‘덕후’형이란 수식이 붙었다. 언뜻 달라 보이는 세 부류는 그러나 각성이 잉태한 환희의 맛을 매일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통한다.

‘돈키호테’ 형의 이찬우(45) 피규어 아티스트, ‘노마드’ 형의 이진주(39) ‘걸스로봇’ 대표, ‘덕후’ 형의 김태형(39) 연극 연출가가 지난 20일 밤늦게 머니투데이 회의실에 모여 타자의 맞춤 인생에서 벗어나 오롯이 제 인생을 즐기는 노하우와 배경을 털어놨다.

-남들처럼 가는 길에서 빗겨난 계기가 무엇이었나.

이찬우 작가. /사진=임성균 기자

▷이찬우 작가(이하 이 작가)=“취업률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취향이 없었다. 도서관에 가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으로 공부하는 걸 보니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대학 전공이 화학인데도 졸업하고 공무원 준비를 했을 정도니까. 90년대 말,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가 무작정 상경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2012년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피규어에 흥미를 느껴 처음 도전했는데, 내 적성과 너무 잘 맞았다. 수입은 없었지만 정말 신나게 만들었다.”

▷김태형 연출(이하 김 연출)=“한성과학고와 카이스트를 거치면서 깨달은 건 공부가 어렵고 재미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땐 자존감도 높지 않아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몰랐다. 무엇보다 내가 잘 못한다는 걸 남들한테 드러내는 게 무서웠다. 나처럼 모범생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우수한 집단에서 1등 하지 못하면 자괴감에 빠지기 쉬웠으니까. 어쩌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생 부모님 욕망에 이끌려 살다가 고교 때 취미활동으로 하던 연극은 재미와 가치를 충분히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하는 삶’에 대한 결정적 동기는 내가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진주 대표(이하 이 대표)=“삼성전자에서 시작해 언론사를 거쳐 지금의 ‘걸스로봇’이라는 여성 과학자 네트워킹 회사를 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나와 내 친한 친구는 같은 사범대(서울대 국어교육과)에서 모두 다른 길을 꿈꿨는데, 나는 ‘아빠’ 때문에, 친구는 ‘남자 친구’ 때문에 꿈을 접고 살았다. 나는 종교나 과학을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시집 잘 가기 위해 선생이 되기를 원했고, 친구는 남자 친구의 요구로 사법 고시를 준비했다. 내가 언론사를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가 아이 둘 키우며 ‘아빠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그 친구의 사망 소식(급성백혈병)을 들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인생이 덧없었다. 내 인생을 복기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랬던 것 같다. 과학고에 가고 싶었지만, ‘이상한 여자애 만들고 싶으냐’는 어머니를 향한 선생님의 질책도 있었고, 부모에게 맞춘 삶이 있었고, 대기업 영업부서의 해묵은 여성성도 존재했다. ‘해야 하는 일’에서의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계속될 때, 이것저것 시도했고 급기야 빨리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나운서 시험도 여러 번 봤다. 그렇게 실패를 맛보고 친구의 죽음을 듣고 나서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자각하게 됐다.”

-‘하고 싶은 일’로 얻은 경제적 궁핍이 행복을 보장해 주는가.

이진주 대표. /사진=임성균 기자

▷김 연출=“연극하면 가난하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더 가난하다. 연극과 뮤지컬 연출로 생활할 수 있게 된 게 고작 3년 전의 일이다. 그전엔 연출하면서 공연장에서 조명을 달거나 수학 강의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다. 연출 10년 차에 대기업 초봉 수준의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자부한다. 대한민국 톱10 안에 드는 수입을 버는 연극 연출가라고. 경제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일지 모르나,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같은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물론 연출 3년 차 때만큼 호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진국의 재미를 찾아가는 희열은 여전하다. 자아성취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는 뜻이다. 내가 살아있고, 나 자신을 발견한 것 같고, 이거 아니면 삶의 기쁨이 없을 것 같은 강렬한 순간을 매일 느끼기 때문이다. 마약처럼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이 작가=“피규어를 시작할 때 콤플렉스가 많았다. 디자인도 모르고 화학 전공만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시간이 지난 뒤 영국에서 내 작업을 보고 의뢰한 프로젝트 일을 수행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했다. 학교 다닐 땐 담임선생님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내게 나이키가 작업을 의뢰하니,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돈 벌겠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에 대한 보상을 뒤늦게 받고 있다. 지금은 홍대 조소과에서도 일 배우겠다고 오는 걸 보면, 미지의 개척자라는 자부심과 이에 따른 행복을 동시에 느끼고 산다.”

▷이 대표=“돈이 목표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김 연출처럼 나도 자아실현이 중요했다. 이끌려 다닌 삶은 내가 누구인지, 왜 이걸 하는지 증명하는 과정들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하고 싶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자부한다. 개입자든 관찰자든 한발 걸쳐 들어와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로봇을 빙자해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것도 있다. 능력 있는 과학계 여성들이 더 많이 유입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이면서 기회균등을 외치는 것이다. 2015년 이 일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3년간 그간 번 돈 모두 투자하겠다’고 이미 선언했었다. 돈이 모자랄 땐 명품 가방을 팔고, 결혼 예물도 정리했다. 경제적 궁핍보다 40세에 이르러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실행하는 기쁨이 더 크다.”

-돈키호테 등 신 문화인의 길을 걷는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김태형 연출. /사진=임성균 기자

▷김 연출=“지금 사회에선 공장처럼 찍어내는 형태가 유리할지 모른다. 그렇게 훈련시키고 교육받지 않는가. 남이 가지 않는 길을 새로 가는 툴 자체가 너무 적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주변의 눈치가 존재하는 ‘정답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 시대가 중심인 미래에선 국가와 사회가 필요한 창의적 사람이 살아날 확률은 높을 것이다.”

▷이 작가=“피규어 아티스트도 현재 세계적으로 많지만 어렵게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게 현실이다.”

▷이 대표=“우리의 공통적 특성은 돈과 관계없이 자신이 어떤 계기로 ‘무엇’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되기까지 스스로 계속 집요하게 질문을 한 게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이걸 꼭 해야겠다든가, 내 존재가 지워지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김 연출=“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경쟁의 압박 때문에 탈출구로 나온 창의적 인간은 어쩌면 운 좋게 도망친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났더니, 모르고 싫은 걸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됐다. 일하는 것도 훨씬 더 편해졌고.”

▷이 작가=“자기가 파는 분야를 ‘운’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사실 완벽해지려는 습성의 부담감은 더 커진다. 그 분야의 ‘독보적’이라는 것은 ‘모르는 건 확실히 모른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김 연출=“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 한 가지 일을 하더라도 목숨 걸고,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앞선다.”

▷이 대표=“맞다. 로봇계 상황 제일 많이 안다고 칭찬을 받기까지 미친 듯이 국내외 학회 쫓아다니고, 영어와 기술의 이중고 받으면서 울면서 공부한 적이 적지 않다.”

신 문화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적은 한번도 없다"며 "오로지 내가 즐겁고 행복한가에 대한 자문의 결과로 얻은 자아실현이 목적이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타인의 굴레에서 맛본 처절한 실패라는 교훈이 있었기에 나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임성균 기자

인터뷰 말미. 김 연출은 “개척자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가 중요한 것 같다”며 “그런 부분에 대해 선명하게 자문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 존중받기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허영을 쫓아다닌 자신의 삶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이 대표는 “내 업의 본질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삶의 주체가 중요해요. 내가 죽을 것 같아서 하는 거면 실패해도 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아이들에겐 조금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기회를 더 일찍 주는 게 필요하죠. ‘휘몰아쳐서 당신 인생을 결정하지 마라’고 꼭 얘기해 주고 싶어요.”(이진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