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딛고 당당하게…가족 모두 1억원씩 기부

"내가 돈을 더 벌은 만큼 누군가는 못 번 사람도 있을테니 그래서 ‘나눠 갖자’는 생각에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하는 것처럼 나는 사회에 십일조를 한 셈이죠."

올해 70세. 공자가 70세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從心)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 나이가 된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이 밝힌 기부의 이유다. 지난달 29일 경기 용인시 지산엔지니어링 사무실에 만난 그는 한사코 기부에 대한 의미를 낮춰 말했다.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70), 부인 공봉애씨(56)의 모습 /사진제공=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업을 시작한 후 습관적으로 기부한 것일 뿐 특별하지는 않다는 게 한 회장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회에서 바라보는 그의 기부는 특별하다. 그는 2015년 10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을 기부했고 이듬해 8월 아내 공봉애씨(56)와 아들 재승씨(24), 딸 재현씨(22)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경기 지역에서 한 가족이 모두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한 것은 한 회장 가족이 처음이다. 한 회장은 "평소 교류가 있던 분이 아너소사이티에 가입돼 있는데 이 분을 따라 기부하게 됐다"며 "평소 기부를 하던 것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으로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를 기부로 이끈 사람은 경기 용인의 아너소사이어티 1호 가입자인 박종옥씨다.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청각장애…"나 같은 사람 없길"= 한 회장은 중학교 1학년 때 평소와 같이 등교를 위해 방을 나서는데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뒤 꼬박 두 달을 앓았다. 장티푸스였다. 시골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후유증으로 청력을 크게 잃었다. 보청기를 항상 꼽고 다녀야할 정도로 청력이 약하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평소보다 좀더 큰 목소리로 질문해야 했다.

한 회장은 "자동차라는 존재를 모를 정도로 시골에 살면서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그 때 나는 한번 죽었고 지금 살고 인생은 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 친구들이 조문을 위해 집으로 찾아올 정도 병세가 심각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 회장은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면 청각장애가 이렇게까지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나 같은 후배가 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이후 장애인 시설에 주로 기부를 했다"고 말했다.

한 회장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한 기금도 경기 용인 장애가정을 위해 주로 쓰일 예정이다. 한 회장은 어릴 적 오염된 식수로 인해 장티푸스에 걸린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는 기부도 직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70), 딸 재현씨(22), , 아들 재승씨(24), 부인 공봉애씨(56)가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자녀 기부금은 빌려준 것…"나눠쓰는 것이 이롭다"= 한 회장은 자녀들이 기부한 것을 두고 "빌려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기부 계획을 밝히면서 아들, 딸에게는 우선 내가 돈을 빌려줄테니 기부부터 하라고 했다"며 "나중에 아이들에게 꼭 돌려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회장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돈 관계에 있어 철저했다. 자녀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한 회장은 자녀들의 용돈 3만원을 투자금으로 받으면서 차용증서를 써줬다. 아내가 보증을 섰고 외부에 공증까지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금전관리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3만원으로 시작한 돈이 지금은 억대로 불어났다는 게 한 회장의 설명이다.

그는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족 회원이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들, 딸에게 돈을 제대로 쓰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며 "돈을 아껴 안 쓰는 것보다 나눠 쓰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려주려 했다"고 밝혔다.

두 자녀가 어릴 때부터 봉사활동도 시켰다. 재승씨와 재현씨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용인 지역 장애인복지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스스로 용돈을 벌기 시작한 후부터는 직접 기부를 시작했다.

한 회장은 가족을 넘어 다른 사람들의 기부 참여도 이끌어내고 있다. 예컨대 자선음악회에서 복지기금을 모금하고 그만큼 자신이 더 내는 방식이다. 한 회장은 "내가 앞장서서 모인 기금만큼 더 낸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더 많이 기부를 하더라"며 웃으며 말했다.

지역사회 기부는 한 회장이 사업을 진행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물류창고 사업은 토지를 매입하고 개발 허가를 받는 과정이 중요한데, 한 회장이 일을 맡으면 평소보다 주변의 반대가 적다는 것이다. 각종 분쟁과 소송 등으로 23년간 사업이 중단됐던 용인시 백암터미널 사업도 한 회장의 주도로 지난해 본격화했다.

한주식 지산그룹 회장(70), 부인 공봉애씨(56)의 모습 /사진제공=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대학 등록금으로 첫사업…적게 팔고 크게 남긴다= 한 회장의 첫 사업 밑천은 대학 등록금이었다. 20세 때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등록금을 3개월 늦게 내도 된다는 말에 그 돈을 불리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작은 사무실을 빌려 과외를 하는 것이었다.

한 회장은 "그 때만 해도 중학교 입시가 있어 과외가 많았다"며 "과외를 하다 보니 인건비가 덜 드는 일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독서실을 열었다"고 말했다. 독서실 관리는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책을 읽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그에게 조용한 독서실은 딱 맞는 사업이었다.

한 회장의 독서실은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입실을 위해 면접을 봐야했고 이용료는 다른 독서실의 3~5배였다. 일종의 고급화 전략을 택한 것이다. 특히 고시생들을 중심으로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110석 규모의 독서실에서 고시 합격생이 80명이나 나올 정도였다.

나중에는 독서실 자리를 받기 위해 청탁까지 들어올 정도로 인기였다. 스스로도 "재미를 좀 봤다"고 이야기할 만큼 독서실은 운영이 잘 됐다. 이때 독서실을 운영하며 터득한 '후리소매'(적게 팔고 이윤을 크게 남긴다)는 그의 경영철학이 됐다.

한 회장은 이후 폐기물 처리, 다세대주택 건설, 창고 건설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갔고 지금의 지산그룹을 일궈냈다. 현재 4개의 물류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 최대의 물류터미널인 백암터미널을 비롯해 4곳에 물류시설 건설을 진행 중이다.

한 회장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생각하는 긍정의 힘으로 사업을 추진해온 것처럼 저와 같은 장애인도 당당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다"며 "기부와 봉사도 더 확장해 가족과 함께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