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빠진 '스모킹건' 安 수첩…'靑 캐비닛 문건'은 다를까

삼성의 승마지원이 뇌물이었다면 부정한 청탁과 이에 상응하는 댓가가 있어야 한다는 게 법조계의 얘기다.


특검 측은 부정한 청탁의 대표적 예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하 삼성 합병), 중간금융지주의 추진, 합병 이후 순환출자 해소 과정에서의 처분 주식수 문제 등을 꼽았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청와대 외압이 있었을 것이란 의혹제기다.

이에 반해 50여 명의 증인들이 증언대에 서는 동안 청와대로부터 외압이 있었다는 구체 증언은 없었다.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유력 증거로 제시됐던 '안종범 수첩'은 정황증거로서만 채택됐다. 이 상황에서 특검 측은 이번엔 '캐비닛 문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어 향후 공방전에 관심이 쏠린다.

◇安수첩의 허점 3가지…'일방적 전달·불분명한 기억·합병 언급 없어'=특검이 '부정한 청탁' 즉 댓가성의 증거자료라고 본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독대 직전 작성된 대통령 말씀자료와 안종범 수첩이다.

말씀자료는 실제 작성자인 청와대 행정관들이 당시의 언론기사를 토대로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또 박 전 대통령이 실제 그대로 읊었는지 입증되지 않아 안종범 수첩에 비해서는 관심도가 떨어졌다.

안종범 수첩은 이 부회장 구속에 중대영향을 끼친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으로 알려져 공개되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반해 안 전 수석이 지난 4~5일, 이틀간 법정에 선 동안 공개된 수첩에서는 강한 증명력을 갖추기엔 여러 한계점도 지적돼 눈길을 끌었다.


우선 주로 전화통화상 급하게 받아 적은 단어 형식으로 나열돼 안 전 수석의 부연 설명 없이는 쉽게 의미파악이 어려웠다. 본인도 "급히 받아적어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많다"고 증언했다.

또 수첩 기재 내용만 보고는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지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2016년 2월15일자 메모에는 △센터 펀드 감사, △고택 명품화, △기후변화 ESS, △바이오 신산업, △금융지주회사, △미르-K스포츠, △중국 1조, △빙상, △승마 등 단어가 맥락 없이 나열돼 있다. 당시는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 3차 독대가 있던 시점이다.

바이오 신산업 부분에 대해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이 신산업에 투자를 많이 하라고 한 것인지 이 부회장이 많이 하겠다고 한 것인지는 모른다"며 "누가 누구에게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논리라면 메모장에 기재된 '금융지주회사'란 단어 역시 '부정한 청탁'의 역할을 했는지 산업계 일반적 이야기를 한 것인지 분명치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성 합병에 대한 메모가 기재돼 있지 않다는 점. 안 전 수석은 "삼성 합병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며 "지시 받았다면 수첩에 최소 한 번이라도 기재됐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합병이나 중간금융지주회사 전환, 순환출자 해소 등의 문제에 있어서 이 부회장의 청탁이 박 전 대통령에 전달됐고, 청와대가 해당기관에 압력을 행사했으면 이같은 고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이번 재판의 핵심 과제였다.

그러나 주요 증인들의 진술도 특검이 그린 '큰그림'을 입증하는 데는 다소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정재찬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삼성 순환출자 문제는 개정된 공정거래법상 첫 적용사안으로 법리적 해석과 경제에 미칠 충격을 고려해 본인이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은보 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삼성생명 금융지주사 전환과 관련해 금융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사안이라 판단해 청와대에 보고했다"며 "안 전 수석의 보고를 받고도 별다른 언급이나 지시를 안해 이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운했다"고도 진술했다.

금융지주회사 전환안은 2016년 1월부터 금융위 측과 논의가 시작됐지만 금융위와 삼성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결국 지난해 4월 보류됐다.

◇安수첩 이어 캐비닛 문건? 증명력에 관심 집중=재판부는 결국 안 전 수석에 대해 이틀에 걸친 강도높은 증인신문 끝에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의 개별면담에서 수첩에 기재된 내용대로 대화를 했다는 진술증거로서의 증거능력은 인정할 수 없다"며 "수첩에 기재된 내용이 존재하고 독대 당시 대화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간접사실로 증거능력을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수첩 메모를 대가성을 입증하는 직접증거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워 추가 심리를 통해 사안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겠다는 의지로 풀이됐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증거 채택여부만큼 중요한 것이 증명력"이라며 "정황증거가 직접증거보다는 증명력이 약하기 때문에 특검 측이 혐의를 입증할 증거들을 추가로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증언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검 측이 이렇듯 혐의 입증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4일부터 청와대에서는 이른바 '캐비닛 문건'이 다수 속출하고 있다. 지난 21일 특검 측은 청와대에서 최근 발견된 문건 16건을 법원에 제출했고 오는 25일 공판에서는 작성자들을 법정에 증인으로 불러 작성 경위를 신문할 예정이다.

양재식 특검보는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작성·출력한 문건"이라며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 지원 관련 문건과 담당 행정관이 진술해 검사가 작성한 진술서 사본 등"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삼성그룹 최대 현안이었다는 걸 청와대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취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해당 문건은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독대 한 달 전인 2014년 8월에 작성된 것이어서 부정한 청탁 및 댓가성 입증에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또 '삼성의 경영권 승계 국면' '기회로 활용' '경영권 승계 국면에서 삼성이 뭘 필요로 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등 자극적 문구들만 먼저 알려졌기 때문에 안종범 수첩과 마찬가지로 여론 형성용이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