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질금리 '뚝'…성장잠재력 한계 왔나

경기가 좋아지면 돈값이 오르게 마련이다. 자금 수요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시중 돈값을 반영하는 지표가 실질금리다. 명목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빼면 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미 경기회복에 대한 확신을 근거로 기준금리 인상을 본격화했다. 영란은행(BOE)과 유럽중앙은행(ECB) 등 다른 주요 중앙은행도 조만간 그 뒤를 따를 태세다. 실질금리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상하게도 저금리 기조가 더 뚜렷해졌다. 지난해 말 반짝 올랐을 뿐 올 들어 다시 내림세로 돌아섰다.

대표적인 실질금리 지표인 10년 만기 미국 물가연동국채(TIPS) 금리는 지난해 말 0.71%에서 2일(현지시간) 현재 0.48%까지 떨어졌다. 지난 2월에는 한때 0.3%를 밑돌았다. 변화무쌍해 보이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 2%를 훌쩍 넘었던 데 비하면 역사적 저점 수준에서 맴돌았을 뿐이다.

또 다른 실질금리 지표인 미국의 30년 만기 고정 모기지(주택담보대출) 평균금리도 지난해 말 4.32%까지 올랐다가 지난달 27일(주간 기준) 현재 3.92%로 떨어졌다. 금융위기 전에는 수년간 6%대에서 움직였다.


전문가들은 실질금리가 하락한 게 경기회복세에 대한 불신 탓이라고 지적한다. 금과 은 등 실물자산 가격이 최근 다시 가파르게 오른 것도 경기에 대한 불안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금 선물가격은 지난 1년간 7% 떨어졌지만 최근 1개월 동안 4% 넘게 반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성장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꺾인 것도 저금리 기조가 다시 강해지는 배경이 됐다. 감세, 재정지출 확대 같은 그의 경기부양 공약은 아직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재닛 옐런 FRB 의장,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등이 최근 통화긴축을 놓고 발언 수위를 다소 낮춘 것도 저금리 추세에 힘을 실어줬다.

도널드 엘렌버거 페더레이티드인베스터 투자전략가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실질금리 하락세가 지속되는 건 잠재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을 의미한다"며 "올해 재정부양 기대가 점점 더 요원해지고 물가상승률이 FRB의 목표치인 2%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FRB의 정책금리가 중립 수준에서 크게 멀지 않다는 옐런 의장의 최근 발언을 상기시켰다. FRB의 금리인상폭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스탠리 피셔 FRB 부의장은 지난달 31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연설에서 자연금리가 낮은 것은 성장잠재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자연금리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경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궁극적인 금리를 말한다. 중립금리, 균형금리라고도 한다.

피셔 부의장은 이 같은 저금리 기조가 경기순환의 결과라기보다 저성장, 고령화, 투자·저축 부진 등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 생긴 여러 요인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 유로존, 영국, 일본 등 선진국의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에 가깝고 상당수 신흥국에서도 금리가 하락하는 등 실질금리가 낮은 건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저성장 기조 아래 세계 경제가 통합되면서 각국의 장기 균형금리가 낮은 쪽으로 수렴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피셔 부의장은 난국에서 벗어나려면 생산성과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중앙은행보다 정부 차원의 재정·규제정책이 효과가 더 클 것으로 봤다.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과도한 저금리 기조가 이미 거품 상태인 채권시장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지난 1일 블룸버그와 한 회견에서 "아무리 봐도 실질장기금리가 너무 낮아 지속될 수 없는 상태"라며 "금리가 오를 때는 상당히 빨리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린스펀은 "채권시장 거품이 붕괴하면 장기금리가 오를 것이라는 게 진짜 문제"라며 1970년대 이후 보지 못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은 불황 속에 물가가 치솟는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