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드림’ 이룬 역사 속 외국인들

요즘 TV는 외국인 전성시대다. ‘비정상회담’처럼 아예 외국인들이 이끌어 가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신기한 일도 아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나들고, 전체 인구의 4%에 육박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드는 대한민국! 그럼 옛날에는 어땠을까? 한국사에는 ‘코리안 드림’을 이룬 외국인들이 수두룩하다. 다문화 조상들이다.

현재 방영 중인 사극 ‘왕은 사랑한다’에도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원나라 원성공주 곁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호위무사 후라타이다. 역사 속 후라타이는 1274년 공주의 개인 시종으로 고려에 왔다. 시종이라고 얕보면 곤란하다. 뒷배가 무려 쿠빌라이 칸의 친딸이다. 왕도 어쩌지 못하는 막강 실세라고 봐야 한다.


충렬왕은 후라타이를 장군에 임명하며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고려에 귀화하라는 뜻이었다. 후라타이는 친분이 있던 대장군 인공수의 성을 빌려 ‘인후(印侯)’라고 칭했다. 그가 연안 인씨의 시조가 된 순간이다. 원래 인후가 충렬왕에게 받은 본관은 승평, 즉 지금의 순천 지역이었다. 연안으로 바뀐 것은 훗날 아들 인승단이 연안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고려 사람이 되었지만 인후는 원나라를 위해 일했다. 충렬왕이라도 황제의 뜻을 거스르면 대들기 일쑤였다. 원나라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쿠빌라이 칸을 도우러 가야한다며 민간의 말들을 약탈하는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다만 황제와 고려왕 사이에서 주선자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차츰 이 나라에 보탬을 준 업적들도 쌓였다.

‘고려사 열전’은 인후가 고려에 반기를 들고 원나라에 붙은 평양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충신 김방경이 친원파들에게 무고를 당하자 황제에게 해명한 것도 그이였다. 나중엔 원나라 대신들로부터 ‘고려 왕실의 늙은 종’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것이 귀화인의 운명이다. 자식과 후손들이 고려 사람으로 살아야 하니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해 싸운 일본인 장수 김충선은 인후와는 여러 모로 대비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본명은 ‘사야가’로 가토 기요마사 휘하의 청년 선봉장이었다. 1592년 3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그런데 사야가는 개전하자마자 단 며칠 만에 투항했다. 일본군이 조선을 거침없이 유린하는 상황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모하당문집’에 따르면 그는 본국에 있을 때부터 ‘예의의 나라’ 조선을 동경했다고 한다. 요순(堯舜)시절을 흠모하여 동방예의지국의 백성이 되고자 한 것이다. ‘예의의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도 강했다. 투항 직후부터 일본군에 맞서 힘껏 싸웠다. 왜적의 내부사정을 조선에 귀띔하며 경주와 울산에서 적군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 전공을 가상히 여겨 성명을 하사했다. “바다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며 ‘김해 김(金)씨’라 했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충선(忠善)’이라고 지었다. 임금의 은혜에 감동한 김충선은 더욱 분발했다. 조총을 개발하기 위한 이순신의 자문에 적극 응했으며, 울산 도산성에서는 일본군을 격파하고 왜장의 목을 바쳤다.

‘충성스럽고 착한’ 김충선의 태도는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에도 60대 노구를 이끌고 광주 쌍령에서 청나라 기병과 싸웠다. 얼마 후 세상을 떠나자 달성군에 그를 기리는 녹동서원이 세워졌다. 유생들이 청원하고 인조가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었다. 한 일본인의 헌신적인 짝사랑에 ‘예의의 나라’가 응답한 셈이다.

이번에는 통일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전염병을 쫓는 노래와 춤의 주인공 처용은 아랍인으로 알려져 있다. 9세기 헌강왕이 개운포, 지금의 울주에서 괴상한 복장을 한 채 춤추고 노래하는 기인을 만났다. 이곳이 국제 무역항이었으니 신분은 상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하며 동서를 넘나들던 아라비아 상인 말이다.

그 무렵 신라에서는 아라비아 향료가 인기상품이었다. 어쩌면 처용은 노래와 춤으로 호객을 하면서 향료를 팔다가 왕의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그를 일컬어 ‘삼국유사’에서는 ‘용의 아들’, ‘삼국사기’는 ‘산해(山海)의 정령’이라고 묘사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향료 브랜드처럼 들린다. 그게 아니면 아라비아 히트곡 제목이었을 수도 있겠고….

뭐가 됐든 처용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인물임은 틀림없다. 헌강왕도 그에게 끌렸다. 환상적인 노래와 춤이 신라의 엔돌핀을 돌게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처용을 신라에 눌러 앉히기 위해 왕은 급간 벼슬을 내리고 신라인 아내도 붙여주었다. 그런데 아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만 외간남자가 꼬이고 말았다.

“서울 달 밝은 밤에 늦도록 놀다가 / 들어와 잠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고? /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 하리”

‘처용가’는 외간남자로 변신한 역신이 아내와 동침한 것을 한탄하는 노래다. 역신(疫神)은 곧 전염병을 말한다. 그가 노래 부르면서 춤추자 역신이 본모습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처용의 얼굴 그림을 대문 앞에 붙여서 전염병을 막는 풍습이 여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궁궐에서 ‘처용무’를 행하여 악귀를 쫓아내기도 했다.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온 아라비아 상인이 이 땅에서 제 얼굴을 무기로 ‘액막이 무당’ 노릇을 할 줄이야.

다문화 조상들은 이렇게 한국 땅에 뿌리 내리고 문화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고 하지만 폐쇄적이지는 않다. 육로와 바닷길로 다양한 이민족과 교류하고 피를 섞었다. 연안 인씨(몽골), 청해 이씨(여진), 경주 설씨(위구르), 화산 이씨(베트남), 거창 신씨(중국) 같은 외래 성씨들이 징표다. 다문화 유전자는 역사 속에 각인돼 있다. 그것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로 표출된다. 코리안 드림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