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한 선생님, 다니엘 린데만이라고 아세요?” “아니요. 누군데요?”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외국인인데 지난주에 연주회를 했었습니다.” 집에서 TV를 치운 지 15년이 넘었는데 알 턱이 있나? 어쨌든 스튜디오의 모니터 룸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는데 뭐랄까? 늘 프로의 연주만 듣다가 아마추어의 연주를 들으니 TV에 나오는 여자 탤런트 얼굴만 보다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여학생의 얼굴을 본 것처럼 풋풋함이 느껴졌다. “어때요? 앨범 한 번 제작해 보실래요?”


이미 한 장의 앨범을 제작했고, 몇 장의 앨범을 더 제작할 계획이 세워져 있지만 요즘 세상에 앨범 제작으로 돈을 번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프로 연주인도 아니고 연주 능력으로 보자면 그저 그런 아마추어의 연주로 앨범을 제작한다는 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막말로 연주자는 앨범이 안 팔려도 본인의 디스코그래피에 한 줄을 더 써 넣을 수 있지만, 제작자는 앨범이 안 팔리면 그대로 그만큼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아무리 작은 앨범이라도 앨범 제작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간다. 방송에 출연중인 유명인이라지만 유명인과 유명인의 앨범 제작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고 이건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게임이다.

다음 날 스튜디오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녹음 날짜 잡으시죠. 한 번 해 봅시다.” 전화를 거는 순간까지 들었던 의문.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4인조 스트링 세션을 넣고 편곡자도 소개받았다. 세상에나, 10여년부터 알고지낸 지인의 아들이다. 그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피아노를 다시 튜닝하고 모니터 룸의 상태도 점검 완료. 드디어 벽안의 독일 청년이 손을 풀기 시작한다. 모니터 룸 안에서 그 청년을 지켜보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스튜디오 대표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오늘은 한 선생님께서 프로듀싱 해보시죠?”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녹음 프로듀서가 되어 마이크를 잡았다. 영화에 비유하면 만년 조감독이 드디어 입봉을 하게 된 셈.

프로듀서의 역할은 연주자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여 최고의 연주를 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당근과 채찍이 같이 필요한 일. 그런데 긴장한 탓일까? 연주자의 손가락이 계속 꼬인다. 이런 상황에선 녹음을 이어가는 게 무의미하다. “린데만씨, 우리 커피 한 잔 할까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왜 이 앨범의 제작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예의바르고, 밝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그의 성격이 그의 연주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었다. 그의 연주 실력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긴장이 풀어진 탓일까? 터치가 훨씬 좋아졌다. 다행인 것은 본인도 완성도에 대한 욕심이 나서인지 몇 번이고 다시 연주를 하고 연주의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서 좋은 연주를 위해 노력을 했다는 점.

다음 날 오전까지 연주는 이어졌고, 오후에는 스트링 세션 녹음을 했다. 이틀 만에 모든 연주의 채보는 물론 스트링 세션의 편곡까지 끝낸 편곡자 덕분에 녹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피아노 연주 위에 얹어진 현의 울림에 스튜디오 안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다시 한 번 음악의 위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

그렇게 나의 입봉은 끝이 났고 지금은 후반 작업 중이다. 아직도 이 앨범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할지 실패를 할지는 미지수다. 믹싱, 마스터링, 앨범 디자인, 프레싱, 그리고 앨범의 성공 여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홍보 전략 수립 등등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이다. 남들이 보면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이 재미없는 세상에 그나마 세상사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웃으며 기꺼이 그 일들을 떠맡는다. 내 블로그와 SNS의 대문에는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라는 글귀가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