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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없는 살인, 증거없는 청탁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증거없이 '묵시적 청탁' 인정한 이재용 1심 재판부…판사의 '자유심증'도 '증거법정주의' 기반해야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입력 : 2017.09.0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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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6월12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흰 연기가 새어나왔다. 이웃의 신고를 받은 경비원이 인터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재를 의심한 경비원이 119에 신고했고 소방관들이 출동했다. 연기의 원인은 안방 장롱에서 시작된 화재였다. 불을 끈 뒤 현장을 수습하던 소방관이 욕조에서 발견한 건 치과의사였던 30대 여성과 그 두살배기 딸의 시신이었다. 이른바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이다.

유력한 용의자로 외과의사였던 남편 이모씨가 지목됐다. 시신이 발견된 당시 이씨는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첫 출근한 상태였다. 검찰에 따르면 이날 새벽 이씨는 누나를 개인병원 사무장으로 들이는 문제로 아내와 크게 다퉜다. 격분한 이씨는 아내와 딸을 살해한 뒤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시신을 담그고, 장롱에 불을 지르고 출근했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2003년 대법원은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씨의 혐의를 뒷받침할 직접증거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지문도 혈흔도 목격자도 없었다. 수많은 정황증거가 이씨를 향했지만, 대법원은 이씨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논란이 된 판결이지만,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에 따르면 불가피한 결론이다.

형사소송법 제307조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도 적시하고 있다.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면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정황증거만으로 유죄 선고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우리 형법은 '증거재판주의'와 함께 '자유심증주의'도 채택하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엔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고 돼 있다. 정황증거만 있더라도 법관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법관의 자유심증도 어디까지나 증거법정주의라는 테두리 안에서만 허용된다. "범죄사실을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하다는 확신을 법관에게 주는 '증명력 있는 엄격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례다.

여자친구에게 산낙지를 먹여 질식사에 이르게 한 뒤 보험금을 타낸 혐의를 받은 '산낙지 살인사건' 피고인에게 대법원이 무죄 선고를 내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은 이 사건 판결문에서 "검사의 증명 정도가 확신을 충분히 주기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등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서 1심 재판부는 "명시적 청탁을 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묵시적 청탁을 했다며 '제3자 뇌물' 혐의에 대해 일부 유죄를 선고했다. 문제는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는 직접증거도 없다는 점이다.

1심 재판부는 "묵시적 청탁을 인정하기 위해선 당사자 사이에 '금품이 청탁한 집무집행의 대가'라는 공통의 인식이나 양해가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공통 인식이나 양해가 있었다는 직접증거를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제시하지 못했다. 청와대 참모들이 이 부회장과의 독대를 앞둔 박 전 대통령에게 적어준 말씀자료라는 정황증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이 부회장이 그런 대가 관계를 인식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대법원 판례를 따른다면 이 부회장의 제3자 뇌물 혐의에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선 '대가성에 대한 상호 공통 인식이 있었음'을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할 '증명력 있는 엄격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모르고 판사만 아는 '증명력 있는 엄격한 증거'가 따로 있었을까?

이번 재판 결과가 논란이 되는 건 법관의 자유심증 역시 증거법정주의에 기반해야 한다는 형사소송의 기본 원칙과 대법원의 확립된 판례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다. 항소심 판결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상배
이상배 ppark140@gmail.com twitter facebook

머니투데이 법조팀(the L) 반장입니다. 법을 읽어주는 친절한 도우미 'the L' 사이트(http://thel.mt.co.kr/)를 방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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