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벙커·석유저장고…문화예술 품은 도심 속 잉여공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VIP실을 아카이브 전시실로 구성했다. 화면에는 윤지원 작가의 영상작품인 '나, 박정희, 벙커'가 나오고 있다.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올해 문화예술계와 건축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도시재생'이다. 인구 1000만의 초거대 도시에는 과거의 이야기를 간직한 낡고 버려진 장소들이 있다. 수십 년 간 시민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들이 문화예술공간으로 문을 활짝 열었다.

20일 문화예술계와 서울시 등에 따르면 내년까지 시민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던 유휴 공간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올해만 해도 서울 영등포구 '지하비밀벙커',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와 '한강 함상공원', 중구 '덕수궁 돌담길'(추가 100m 구간) 등 4개 공간이 새단장을 마쳤다.


가장 최근 문을 연 곳은 '지하비밀벙커'다. 매일 아침 금융권 직장인들을 실어다 나르는 여의도 버스환승센터 아래에 있는 200평 규모의 비밀 공간이다. 2005년 4월 환승센터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곳으로, 전문가들은 1977년 국군의 날 행사시 박정희 전 대통령 경호를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벙커가 40년 만에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시립미술관(SeMA)은 1년 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일 'SeMA 벙커'를 개관했다. 개관 기념 전시인 '여의도 모더니티'는 9명의 작가가 여의도를 중심으로 수직과 수평, 과거와 현재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장면을 구성한 근현대 전시다. 대통령 VIP실로 추정되는 안쪽 공간은 변기와 수도시설 등을 보존했다. 현재 사료와 영상작품으로 구성된 '역사갤러리 특별전'이 개최 중이다.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과장은 "원래는 인근 쇼핑몰과 연계하는 방안 등이 고려됐으나 활용도가 높지 않다고 판단해 문화예술 시설로 조성하게 됐다"며 "지하 유휴공간 활용계획에 함께 포함된 '경희궁 방공호'와 '신설동 유령역'도 함께 시민들에게 개방한다"고 밝혔다.

지난 8월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취재진들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석유저장탱크 및 주변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스1

지난달에는 마포구 '문화비축기지'가 새로 문을 열었다. 1973년 중동전쟁으로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뒤 1976년부터 3년간 축구장 22개 크기의 14만㎡ 부지에 거대 유류탱크 5대(6907만ℓ)가 들어섰다. 1급 보안시설로 지정돼 일반인 출입이 철저히 통제됐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안전상의 이유로 아예 폐쇄됐다.

비축기지는 문화공간으로 조성돼 41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특히 탱크 4대를 공연장과 강의실로 조성하는 등 근현대적 가치가 있는 기존 시설물과 내외장재를 활용한 점이 호평을 받고 있다. 기지 중앙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거대 모래 언덕이 있다. 주말에는 '달시장', '서울밤도깨비야시장'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진행된다.

이외에도 지난 8월에는 덕수궁 돌담길 100m 구간이 추가 개방돼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959년 영국대사관이 해당 구간을 점유하면서 60여 년간 일반 통행이 제한됐다. 퇴역 해군함정 3척을 활용해 조성한 '한강 함상공원'도 이달 개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상준 동신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잉여공간을 활용한 복합문화예술시설은 쇠퇴된 지역과 가난한 예술가가 상생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쇠퇴 지역의 경우 비싼 돈을 들여 유명한 예술가를 불러들이기 힘들기 때문에 문화콘텐츠가 부족하다"며 "가난하고 소외된 예술가에게 전시나 레지던시(예술가가 입주해 작업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기회가 돌아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