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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죄가 없다. 국가에 충성했을 뿐"

[the L]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악마가 된 '평범한 군인' 아이히만…충성도 때론 죄가 된다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입력 : 2017.11.10 05:00|조회 : 6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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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죄가 없다. 국가에 충성했을 뿐"
1934년 1월, 독일 나치의 친위대(SS) 소속 젊은 상병 아돌프 아이히만이 베를린 나치 사령부에 발탁됐다. 규칙을 잘 따르고 부지런하며 충성스럽다는 평판 때문이었다. 그는 사령부의 유대인 정책 부서에 배치받자 유대인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히브리어를 공부할 정도로 열정을 보였다.

유대인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4년만에 대위까지 고속승진한 그는 1938년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이주정책 책임자로서 1년만에 유대인 15만명을 추방하는 높은 성과(?)를 보였다. 이를 인정받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엔 나치의 유대인문제총국으로 영입돼 모든 독일 점령지 내 유대인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1942년 1월 나치는 모든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등에 강제수용한 뒤 '최종 해결'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이들이 말한 '최종 해결'이 바로 5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희생시킨 이른바 '홀로코스트'다. 아이히만은 이 계획에 따라 헝가리에서 유대인 이송 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그는 부하들에게 "500만명의 죽음이 개인적으로 양심에 걸린다는 사실은 엄청난 만족감의 원천이기도 하다"며 "따라서 나는 기쁘게 무덤으로 뛰어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연설을 했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포로로 잡힌 그는 신분을 속여 풀려난 뒤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그러나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에 붙잡혀 결국 예수살렘 법정에 서게 됐다. 1961년 법정에서 그는 당당한 표정으로 "나는 국가의 명령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뿐이었다"며 "나는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고, 복종은 미덕"이라고 했다. 일말의 죄책감도 내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유대인 수송만 담당했을 뿐 학살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이듬해 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유대계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이란 말로 묘사됐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자 공무원으로서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을 뿐이지만 이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대해 "그를 최악의 범죄자로 만든 것은 '순수한 무사유'였다"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그의 죄라는 얘기였다.

"재직 기간 동안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국가정보원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방해한 혐의로 7일 구속된 서천호 전 국정원 2차장이 검찰의 조사를 받기 전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서 전 차장은 2013년 검찰의 '국정원 댓글공작'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TF(태스크포스)를 꾸려 위장 사무실과 가짜 서류를 만든 혐의를 받고 있다. 또 국정원 요원들에게 수사와 재판에서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한 정황도 드러났다.

경찰 출신인 서 전 차장이 수사기관을 속이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몰랐을 리 없다. 형법 제137조에 따르면 위계(속임수)로써 공무원의 직무집행을 방해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만약 서 전 차장이 검찰 수사를 방해한 게 사실이라면 그는 왜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선택을 했을까?

국정원장의 지시없이 차장이 단독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상관의 지시가 불법의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상관으로부터 신념에 어긋나는 부당한 지시를 받았을 때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기만'을 선택한다. "이 정도는 괜찮다"며 스스로를 속인다. 현실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게 쉬워서다.

심리학에 '인지적 부조화'란 게 있다. 자신의 신념과 상충되는 현실적 상황에 처할 때 겪는 심리적 불안을 말한다. '인지적 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이런 심리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맞게 바꾸고 이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자신의 행동을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포장하는 건 이런 심리의 발로다. 그가 충성은 했을지 몰라도 그 대상이 '국가'는 아닌듯하다. 그는 과연 몰랐을까? 충성도 때론 죄가 된다는 걸.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7년 11월 9일 (05:01)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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