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비서 마음을 얻는자, 물건을 판다

A: 건조기가 필요한데 나에게 맞는 상품을 추천해줘.
B: 고객님, △△사의 ■■와 ◇◇사의 ◆◆을 추천해드립니다.

인공지능(AI) 스피커로 물건을 사는 세상이 도래했다. 오프라인 매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대신 나만의 AI 비서가 내 취향을 분석하고 추천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제품을 권한다. 백화점이나 매장의 점원이 하던 역할을 AI 비서가 해주는 셈이다. AI 비서가 소비자의 구매패턴을 바꿔놓기 시작하면서 유통업계도 긴장하는 분위기다. 제품 결정의 주도권이 개인이 아닌 AI 비서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감마저 감돌고 있다.


◇늘어나는 AI 스피커…위협받는 유통시장=시장조사기관인 컨슈머인텔리전스리서치파트너스(CIRP)에 따르면 올 3분기 기준 미국 내 AI 스피커 설치 대수는 2700만대를 기록했다. 이 중 아마존 AI 스피커 수가 2000만대를 차지한다. 글로벌 광고대행사 운더만(Wunderman)의 고객경험 책임자 로브 커란은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몰 링크를 클릭하는 대신 음성 명령을 통해 AI 가상비서로 쇼핑을 하게 되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인공지능(AI)기술이 쇼핑과 결합되면서 결국 AI 비서가 퍼스널 쇼퍼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선두에는 이 시장을 개척한 아마존이 있다. 아마존의 AI 비서 ‘알렉사’가 탑재된 에코의 특징 중 하나는 ‘제품 추천’ 기능이다. 에코에 대고 “티슈를 주문해 줘”라고 말하면 기존에 주문했던 제품이 있는 지를 확인하고 해당 상품을 다시 주문할 것인지 물어본 후 제품 재고가 없을 경우 자체적으로 검색엔진을 돌려 추천 제품을 알려준다.

구글이 유통업계를 파고드는 전략도 이와 비슷하다. 구글은 올해 2월 자체 쇼핑서비스인 ‘구글 익스프레스’를 출범하면서 코스트코, 콜스, 월마트, 타깃 등 미국 대형 유통업체들을 줄줄이 입점시켰다. 소비자들은 코스트코, 월마트에서 취급하는 다양한 상품들을 AI 스피커나 안드로이드폰에 말하면 간단하게 구매할 수 있게 됐다. 구글 홈이나 구글 익프레스 웹사이트에서 구글 AI 비서인 ‘구글 어시스턴트’가 월마트의 상품을 소개해주는 식이다.


국내에서 AI 스피커를 출시한 곳들도 자체 플랫폼에서 이용할 수 있는 쇼핑 서비스를 확대 중이다. SK텔레콤의 ‘누구’는 자회사 SK플래닛이 운영하는 오픈마켓 ‘11번가’ 일부 상품군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시범적으로 서비스 중이고 KT의 ‘기가지니’도 이베이코리아와 머리를 맞대고 쇼핑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네이버 ‘프렌즈’와 카카오 ‘카카오미니’는 차차 쇼핑, 배달음식 주문 등의 기능을 추가한다는 계획이다.

◇“고객 모시기 전에 AI 스피커부터 파악해야”=소비자 입장에서는 AI 스피커가 더 많은 업체들과 제휴할수록 다양한 상품을 접할 수 있어 좋지만 이를 바라보는 유통업계의 속내는 복잡하다. 자칫 제품 유통의 주도권을 AI 가상비서에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운더만은 “소비자의 구매 절차에 대한 통제권이 유통업자가 아닌 AI에 귀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플랫폼 사업자의 권한은 막강하다. 오프라인이나 단순한 온라인사이트에선 유통업체가 상품을 어떻게 광고하고 어디에 배열하느냐가 판매를 좌우하는 요소였다. 반면, AI 쇼핑의 경우, 평상시 소비자가 이용하는 상품군의 종류와 가격, 소비자의 연령대와 취향 등 광범위한 데이터를 근간으로 추천되기 때문에 판매자의 개입이 최소화된다.

AI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IT 공룡들의 움직임도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다. 아마존은 최근 미국 가전제품 유통업체인 ‘베스트 바이’에 아마존 AI 비서인 알렉사를 개방했다. 앞서 스포티파이와 판도라 서비스 등의 음원 업체에 알렉사를 개방한 아마존이 경쟁사라 할 수 있는 베스트바이에도 문호를 열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IT전문매체 엔가젯은 “유통업체들이 알렉사 플랫폼에 탑승해 제품 판매를 확산한다면 구글, 월마트 등의 연합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AI로 물건 팔려면 AI 활용부터=국내 사업자들도 AI 쇼핑 서비스 사업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SK플래닛이 운영하는 오픈마켓 11번가의 경우 AI 챗봇 기반 채팅으로 고객이 찾는 맞춤 상품 추천 리스트를 제공한다. 최근 선보인 ‘마트챗봇’은 마트 카테고리 전문 서비스로 과거에 구매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최대 15개의 상품을 찾을 수 있도록 추천한다. 인터파크는 추천 상품 리스트 중 원하는 상품을 선택해 상품 정보 화면으로 이동하면 최저가 검색으로 연계하는 ‘쇼핑 카메라’ 서비스를 선보였다.

오프라인 유통사업자들 역시 AI 플랫폼을 통한 판매보다는 대고객 서비스부터 활용 중이다. 롯데백화점이 내놓은 AI 대화형 로봇 ‘엘봇’은 매장에서 고객에게 제품을 추천하는 쇼핑 도우미 역할 수행이 주요 임무다. 현대백화점의 번역 로봇 ‘쇼핑봇’, 신세계백화점의 고객분석 프로그램 ‘S마인드’도 AI를 기반으로 서비스를 제공한다.

업체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업계의 마케팅 공식도 달라지고 있다. 시장 조사기관 컴스코어는 2020년 웹 검색의 50% 이상이 음성으로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1차 고객이 일반 소비자가 아닌 AI 비서가 될 확률이 높다는 점에서 광고업계는 AI 비서의 취향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운더만은 “유통업체들은 AI비서가 결국 1차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AI 비서가 작동하는 검색 엔진이나 가격 비교 플랫폼에서 자사 상품이 눈에 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LG그룹 광고회사 HS애드 관계자도 “AI의 제품 추천 기능은 추후 광고 상품으로 판매할 가능성이 높다”며 “광고업계도 AI가 광고플랫폼으로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AI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제안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하루 평균 2억 5000만명이 드나드는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는 웹과 모바일 검색 데이터, 지도 이용 데이터 등을 분석해 광고주에게 최적의 소비자층을 연결해준다. 바이두는 세계적인 AI 과학자를 영입하고 총수입의 16%를 AI에 투자해 오고 있다. 바이두에서 B2B 글로벌 총괄을 맡고 있는 린다 린 총경리는 “AI 기술을 기반으로 한 광고는 죽어 있는 광고가 아니라 소비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게 돕는다”며 “음성인식, AR 등의 기술을 활용하면 유저와 활발하게 소통하고 실제 구매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AI가 아직까지는 단순한 물품을 구매하는 데 쓰이면서 당장 유통업계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AI 스피커로 제품을 구매할 때 가격 비교와 제품 디자인 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음성 쇼핑은 반복 구매에 국한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