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방위? 연말 술자리 시비에 "맞아도 참아라"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 최근 30대 남성 A씨는 새벽에 술 취한 상태로 길을 걷다 봉변을 당했다. 모르는 남성 B씨(30대)가 이유 없이 자신에게 주먹을 날렸다. 맞고만 있을 수 없어 B씨의 멱살을 잡는 순간 함께 넘어졌다.


결국 둘은 경찰서까지 갔다. A씨는 코뼈 골절로 수술까지 하고 전치 6주 진단을 받아 의료비 300만원을 썼지만 B씨는 가벼운 찰과상으로 진단서조차 발급받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쌍방폭행으로 결론 내렸다.

# 지난해 술집에서 지인과 술을 마시던 20대 여성 C씨는 옆자리 일행과 시비가 붙었다. 20대 남성이 폭력을 휘두르자 C씨는 남자의 뺨을 때렸다. 이후 C씨는 얼굴과 다리 등을 수차례 맞아 경찰 조사를 받았다. 사실상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쌍방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결국 합의했다.

온라인 법률자문서비스에서 변호사에게 법적 자문을 구한 사례들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정당방위를 인정받기란 매우 어렵다. 연말 늘어나는 술자리에서 시비에 휘말려도 '맞아도 때리면 안 된다'는 말이 익숙하다. 정당방위보다는 '쌍방폭행'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아서다. 위협에 노출돼도 적극 대응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당방위 인정 논란을 일으킨 대표적 사례는 '도둑 뇌사' 사건이다. 2014년 3월 집주인 최모씨(22)가 자신의 집에 침입한 절도 피의자 김모씨(당시 55세)를 알루미늄 빨래건조대 등으로 수차례 때린 사건이다. 김씨는 뇌사상태에 빠졌고 같은 해 사망했다. 최씨는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상해치사죄 책임을 물어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까다로운 정당방위 요건 문제를 수면 위로 올린 계기가 됐다. 201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종합감사에서도 "범죄자에게 흉기는 들고 왔는지, 물건만 훔칠 것인지, 그냥 도망갈 것인지 등을 물어보고 방어 해야 하는 것이냐"는 의원들의 질타가 나왔다.

경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같은 해 4월 정당방위 인정 요건을 정한 '폭력사건 수사지침'을 내렸다.

지침은 △침해행위에 대한 방어일 것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 △폭력행위(정당방위 행위)의 정도가 침해행위 수준보다 중하지 않을 것 △침해행위가 종료된 뒤에는 폭력행위를 사용하지 않을 것 △상대방의 피해 정도가 본인보다 중하지 않을 것 등에 한해 정당방위를 인정하기로 정했다.

2015년에는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사용하지 않을 것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상해를 입히지 않을 것 등 2가지 요건을 제외해 더 유연하게 정당방위를 판단하도록 했다.

이후 정당방위 인정 건수가 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체 폭행사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지침이 내려진 2014년 970건으로 △2015년 1286건 △2016년 2502건 △2017년 2486건(10월 말 기준) 등이 정당방위로 인정받았다. 지난해 폭행 사건이 16만5803건 발생했고 이중 상당수가 쌍방폭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당방위로 인정받기란 아직도 어렵다는 게 수사당국 안팎의 목소리다.

정당방위 요건이 까다로운 이유는 기준의 모호함 탓이다. 형법에 따르면 정당방위는 '현재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가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 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상당한 이유' '방어하기 위한 행위' 등은 입증하기 어려운 애매한 기준이다.

판례를 봐도 정당방위를 가려내기 어려운 현실이 드러난다. 2010년 대법원 판례에는 "맞붙어 싸우는 사람 사이에서는 공격·방어행위가 연달아 행해지고 방어행위가 동시에 공격행위인 양면적 성격을 띤다"며 "어느 한쪽의 행위만을 가려내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라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폭행 사건에는 쌍방폭행뿐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도 포함돼 있어 단순 비교는 어렵다"며 "또 정당방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일단 쌍방폭행으로 입건한 뒤 수사 후 불기소(죄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정당방위 요건을 좀더 세밀하게 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로 기준을 다듬고 실제 현장에 적용해 억울한 시민이 생기는걸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