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도 박테리아처럼 방향성 갖고 움직인다”

박테리아 움직임(왼쪽)과 효소 움직임(오른쪽)<br><br>포도당 등 영양분(파랑)이 있으면, 박테리아(흰색)는 직진했다가 방향을 바꾸는 ‘달리기와 뒹굴기’ 움직임을 반복한다. 효소(빨강)도 기질(녹색)이 있는 환경에서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효소-기질 사이에 반응이 일어나면 기질이 생성물(노랑)으로 변하면서 효소는 ‘달리기와 뒹굴기’를 반복하면서 기질 농도가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자료=IBS

그동안 무작위 방향으로 운동하며 확산한다고 여겨졌던 효소가 박테리아처럼 방향성을 갖고 움직인다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제시됐다. 이는 효소의 이동 기작에 대한 기존 가설을 뒤집는 이론이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첨단연성물질 연구단 스티브 그래닉 단장(울산과학기술원 자연과학부 특훈교수) 연구진이 처음으로 ‘효소의 반(反)-화학쏠림성’을 규명했다고 19일 밝혔다.


효소는 생체에서 촉매작용을 하는 단백질이다. 신진대사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 몸엔 7만여종의 효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질(반응물)은 효소를 만나면 화학 반응이 빨라지며 생성물이 되는 데, 이 때 효소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반응을 조절한다. 이런 효소의 특성으로 생명 유지에 필요한 반응들이 제때 만들어진다.

효소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효소 분자는 촉매 작용 외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 액체나 기체 속에서 미소 입자들의 불규칙하기 움직이는 브라운 운동을 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효소가 기질이 있는 곳에서 확산이 빨라진다는 연구들이 연이어 나오면서 효소가 화학쏠림성을 가진다는 가설이 유력하게 제시됐다. 화학쏠림성은 박테리아나 단세포, 체세포 등이 특정 화학물질 농도가 높은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효소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에는 형광상관분광법(FCS)을 쓴다. FCS는 레이저 빔을 시료에 쏴 빔 영역을 지나가는 형광 입자 정보를 얻는 분석법이다. 실험 대상인 효소에 형광 분자를 달고 FCS로 레이저 빔의 형광 변동을 감지한다. 이를 통해 레이저 영역을 지나는 입자 수, 확산 속도 등 통계적 정보를 얻는다.

연구진은 FCS 분석법에 그래닉 단장 연구팀이 보유한 강점 기술 STED(자극방출고갈현미경)를 접목, 레이저 빔 영역을 극도로 작게 만들었다.

보통 FCS의 레이저 빔 영역은 지름 250나노미터(nm)이다. 효소 지름인 10nm의 25배 길이에 해당한다.

반면 STED-FCS는 빔 영역을 50nm로 줄일 수 있다. 큰 빔 영역에서는 관찰할 수 없었던 미시적인 효소 움직임을 STED-FCS로는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다.

연구진은 두 번의 실험을 진행했다. 먼저 기질과 효소의 상호작용만을 보고자 위치에 따라 농도 차가 나는 칩을 설계했다.

일반 FCS를 이용해 효소인 우레아제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기존 연구와는 반대로 효소가 기질이 적은 쪽으로 이동함을 발견했다.

기질이 많은 쪽에는 효소농도가 낮았고, 기질이 적은 쪽에 효소 농도가 높았다. 기존의 화학쏠림성 가설을 뒤집고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화학쏠림성’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다음으로 같은 칩을 STED-FCS로 관찰해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효소가 한 방향으로 가다가 무작위 방향의 움직임을 반복하는 ‘달리기와 뒹굴기’를 보인 것. 달리기와 뒹굴기는 먹이를 효율적으로 찾고자 직진과 무작위 방향 운동을 반복하는 박테리아의 움직임이다.

박테리아가 먹이 쪽으로 움직이는 반면 효소는 기질이 적은 쪽으로 움직인다. 반응 체계가 없는 효소가 이같이 움직이는 이유는 효소가 촉매작용을 하면서 기질 반대방향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단백질 분자에 지나지 않는 효소가 마치 박테리아나 세포 등 미생물처럼 방향을 갖고 움직였다”며 “앞으로 여러 효소간의 상호작용을 비롯해 신진대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성과는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PNAS 19일자 온라인판에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