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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58년 개띠’] "국내 디자인 1세대…내 인생 아직 2모작"

[릴레이 인터뷰] ③'1세대' 산업디자이너 장동훈 SADI 원장 "8번의 이직…아직도 현장이 좋아"

머니투데이 구유나 기자 |입력 : 2018.01.13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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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띠 앞에 연도를 붙이는 간지는 ‘58년 개띠’가 유일하다. 이 상징이 설명하듯 58년 개띠 출생자들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주역으로 회자한다. 90만 명에 이르는 최다 출생자로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세대다. 생존 경쟁이 치열했지만 고교 평준화 입시제도를 통해 평등의식을 배우고, 가장 일할 나이인 30대 후반 외환위기인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를 겪으며 단합에도 앞장선 이들은 ‘위’로부터 눈치보고 ‘아래’로부터 자극받는 ‘낀 세대’의 전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2018년 60세, 58년 개띠들은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다. 치열한 과거를 딛고 찬란한 현재를 거쳐 제2의 전성기를 준비하는 문화예술계 ‘58년 개띠’ 5명의 인생을 따라가봤다.
장동훈 SADI 원장은 1980년대부터 디자인을 공부한 국내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 손꼽힌다. /사진=김휘선 기자
장동훈 SADI 원장은 1980년대부터 디자인을 공부한 국내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 손꼽힌다. /사진=김휘선 기자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국내 경제 성장사는 화이트칼라(사무직)나 블루칼라(현장 생산직) 노동자의 서사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분명 '변방'의 일에 도전하는 이들이 있었다. 당시 문화예술은 경제 성장에 힘입어 꽃 피기 시작했지만, 기초 산업이 안정된 후에야 등장하는 '디자인'은 여전히 불모의 것이었다.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삼성디자인교육원)에서 국내 '디자인 1세대'이자 '삼성 갤럭시' 디자인 주역으로 알려진 장동훈 원장을 만났다. 원장실 내부는 최신형 TV, 고미술 및 현대미술품, 아트페어 포스터가 한데 모여 어색한 듯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모두 (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이라고 했다.

장 원장은 '1세대' 또는 '디자인 리더'라는 수식어가 쑥스러운 듯 "디자인은 민도와 관련 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천재가 한 명 나온다고 해서 전체가 발전하는 건 아니다"고 강조했다. 다른 예술 분야와 다르게 디자인은 경제가 발전할수록 자연스레 성장한다는 설명이었다.

-58년생에게 '디자인'은 생소한 개념 아니었나요.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은 굉장히 변방의 것이었어요. 제가 91년에 해외에 나갔다 오면서 33인치짜리 대형 소니 TV를 낑낑대며 들여왔는데, 그걸 거의 10년 동안 썼어요. 당시 한국의 제품력, 디자인력으로는 그걸 대체할 제품이 없었던 셈이죠. 그게 불과 20여 년 전 일입니다만,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하기 어려울 거예요."

디자인을 제대로 취급하는 회사도 적었다. 대부분이 디자인 부서 없이 기술, 연구, 마케팅 등의 부서에 관련 업무를 맡겼다. 장 원장은 "상사나 클라이언트가 외국 다녀와선 (실무자에게) 브로슈어(광고 책자) 하나 던져주며 '이렇게 해달라'는 게 당시의 수준이었다"며 "디자인은 '예쁘고 쓰기 편리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디자인 도둑질'이었던 셈이다.

장 원장은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한국 IBM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유일한 미대 출신으로, 웹이나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할 기회였다. /사진=김휘선 기자
장 원장은 서울대 미대 졸업 후 한국 IBM에 입사했다. 당시 회사에서는 유일한 미대 출신으로, 웹이나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할 기회였다. /사진=김휘선 기자

-그런데 어떻게 디자인을 하게 된 건가요.

"부모님이 두 분 다 평안북도 출신이세요. 이북 분들이라 연세에 비해 사고가 진보적이고 진취적이시죠. 특히 어머니가 한국화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릴 때 어머님이 시외버스 타고 도봉산을 비롯해 인근 산과 들로 스케치 나가실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고, 미술실에서 그림 그리실 때는 옆에 앉아서 같이 그렸어요."

장 원장은 1976년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 입학해 시각디자인을 배웠다.(20여 년 뒤에야 디자인학부가 신설됐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음악, 영상, 스토리텔링 등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로서는 미대 졸업 후 IBM 입사가 흔치 않은 선택 같은데요.

"디자인 수요가 많진 않았지만 공급도 적었고,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어느 정도 담보해주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밥벌이가 어렵진 않았죠. 졸업하면 대기업 몇 군데가 줄을 서 있었고, 졸업생의 약 90%가 광고대행사나 대기업 디자인실에 취직했으니까요. 아마 이때 삼성에서 제안이 왔다면 안 갔을 거예요. 하하하."

장 원장은 선배의 소개로 IT(정보기술) 회사인 한국 IBM에서 광고·홍보 일을 시작했다. 당시 회사에선 유일한 미대 출신이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로서 웹(web)이나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공동 작업을 기획하고 팀원들의 작업물을 손보는 역할을 했다.

"(미대 출신이) 아무도 없으니 외롭기도 하고, 디자인과 나와서 이걸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어요. (디자인 전공생에게) '평생 뭐했어?'라고 하면 '내가 직접 그린 거나 작업한 게 이거야'라고 보여주는데 저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컴퓨터 공학을 접할 좋은 기회였죠."

장 원장은 1991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입학해 멀티미디어와 공학 등을 배웠다. 그는 "이때 배웠던 것들이 산업 현장에서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기자
장 원장은 1991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입학해 멀티미디어와 공학 등을 배웠다. 그는 "이때 배웠던 것들이 산업 현장에서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김휘선 기자

-교수직을 마다하고 돌연 유학길에 올랐는데요.

"31세 때 울산대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초빙됐는데, 2년 반 만에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로 유학을 떠났어요. 8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포토샵 1.0', '일러스트레이터 1.0' 등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출시돼서 외국 유수의 디자인 대학들이 마침 이를 활용한 교과과정으로 처음 편성하고 있었거든요.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유학은 만족했나요.

"(시카고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지만 관련 수업은 딱 1개 듣고 나머지는 멀티미디어, 공학 쪽 수업 많이 들었어요. 공학도만큼 깊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이후 산업 현장에서의 이해도를 높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죠. 특히 한 학기 내내 만들었던 코딩(컴퓨터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는 것) 활용 작품은 잊을 수가 없어요. 지금이야 코딩이 많이 보편화했지만 당시에는 코딩 몇 줄 해서 주면 수백만 원을 받던 때였거든요."

-이후에도 직장을 여러 번 옮기셨죠.

"유학 이후 4년간 특수영상, 컴퓨터그래픽, 멀티미디어 전문회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어요. 199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에도 인터넷 환경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95년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로 운 좋게 강단에 서게 됐죠. 그때만 해도 여기가 평생 직장이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삼성전자에서 제의가 들어오면서 나이 50세를 앞두고 도전 의식이 '또' 불타오르더라고요. 남들이 (회사) 나올 때 들어간 셈이었죠."

-이직을 여러 번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삼성은 사실 8번째 직장이에요. 이전까진 2~3년 주기로 직장을 많이 옮겨 다녔어요. 보통 처음 1년은 도전기간이고 2년이면 익숙해지고 3년이 되면 지루해져요. 울산대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때도 '너무 빨리' 안정적인 곳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장이 주는 도전 정신과 성취감을 좀 더 느끼고 싶었어요."

삼성 입사로 그는 '디자인 전문가'에서 '대기업 수장'이 됐다. 장 원장은 "사실 도서관에 가서 리더십 서적을 독파했다"며 "당시 디자인팀에 임원(상무)으로 들어갔는데 부장이 한 명도 없고 다 과장, 대리, 사원이었다. 시각과 공학을 둘 다 챙기면서 조직을 키워나가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후 10년 동안 디자인팀은 인원 500명에서 1500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 됐다.

-조직을 키운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시장 트렌드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원하는지 알아봤는데, 그중 하나가 '편안함'이었어요. '예쁘게 만들자'가 아니라 '사용자 경험'을 중시한 걸 만들자고 생각했죠. 결과는 대박이었어요. '갤럭시 S3'은 애플 누르고 첫 세계 1등을 했죠. 갤럭시 '기어'와 '노트'도 디자인팀에서 처음 제안한 거고요. 큰 액정화면을 좀 작아 보이게 하려다 보니 플립커버가 출시되면서 모바일 액세서리 시장도 커졌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2013년 미국 IT 전문 잡지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는 그를 '올해의 가장 창조적인 인물' 2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 원장은 2018년은 '잠시 쉬어가는 해'라고 말하면서도 60세 이후 새로운 도전을 꿈꿨다. 그는 "아직 인생 삼모작이 시작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사진=김휘선 기자
장 원장은 2018년은 '잠시 쉬어가는 해'라고 말하면서도 60세 이후 새로운 도전을 꿈꿨다. 그는 "아직 인생 삼모작이 시작하지 않았다"며 웃었다. /사진=김휘선 기자

-디자인 1세대로서 현재 디자인 전공생들에게 조언한다면.

"80년대와 비교하면 현재 디자인과나 인력이 3배 이상 늘었습니다. 사실상 포화 상태죠. 이럴 때일수록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새로운 것들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장 중요해요. 저는 남들이 안 간 쪽을 빨리 갔어요. 선점 효과를 노렸다기보단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죠. 요즘 젊은 디자인 전공생들을 보면 대기업 취직이나 공무원 임용이 최대 목표잖아요. 창업 의지는 별로 없더라고요. '나가면 고생'인 것은 맞지만 원래 처음 가는 길 중에 쉬운 길은 없어요."

장 원장은 지난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을 무보수로 맡았다. 그는 "무엇보다 내가 원해서 맡은 직책이었다"며 "'미래들'이라는 주제를 통해 지금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급하게 익히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인이란 세상이 변하는 흐름을 쭉 타고 가는 거니까요. 어떨 땐 가끔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아니까 재밌기도 합니다. 보통 40세 중반까지 이모작, 60세까지 삼모작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아직 이모작 중인 것 같아요. 아직도 현장에 있고 싶지만 일단 올해는 삼모작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잠깐 쉬어가려고요. SADI 원장으로서 역할을 다하면서 사회적 기업같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장동훈 원장 연보>

△1958년 서울 출생
△1983년 서울대 미술대 응용미술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4~1987년 한국IBM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1987~1989년 울산대 시각디자인과 교수
△1991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석사
△1991~1993년 시공테크 아트디렉터
△1993~1995년 포톤연구소 연구위원
△1995~2006년 이화여대 디자인학부 교수
△2006~2013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디자인팀장
△2014~2015 삼성전자 부사장
△2016~ SADI(삼성디자인교육원) 원장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1월 11일 (12:33)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구유나
구유나 yunak@mt.co.kr

안녕하세요 머니투데이 국제부/티타임즈 구유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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