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혹은 '흑기사', 그 불로불사의 판타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말연시다. 누구는 모임이다 뭐다 들떠서, 또 누구는 자신을 돌아보며 차분하게 연말연시를 보낸다. 이 시간이 좀 더 특별한 이유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 그렇게 사람은 늙어가고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간다. 세월의 무게가 더할수록 어쩐지 서글프다.


드라마 속 ‘불로불사(不老不死)’ 캐릭터는 그래서 연말연시에 잘 먹힌다. 불로불사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인간 신부와 연을 맺는 ‘도깨비’ 김신과 한류스타와 사랑을 나누는 ‘외계인’ 도민준이 바로 불로불사다. 방영기간을 보면 그들은 12월부터 2월까지 나이 한 살 더 먹을 때 ‘짠’하고 나타나 늙지도 죽지도 않는 판타지를 제공했다.

해를 넘어가는 또 다른 드라마 ‘흑기사’에도 현대극과 사극을 오가는 불로불사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샤론과 장백희는 200여 년 전 지은 죄로 영원히 구천을 떠도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그것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거나 천벌을 받은 자가 죽지도 못하고 세상을 방랑한다는 유럽의 전설들과 닮았다. 파우스트처럼 파멸과 구원 사이에서 헤매는 불로불사다.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불로불사 하면 신선(神仙)을 떠올렸다. 신선은 도를 닦거나 영약을 복용하여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존재를 말한다. 신선술은 도교, 민간신앙 등과 결합하며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설화에 따르면 건국신화의 주인공 단군, 통일신라의 석학 최치원 등도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 이 불로불사의 존재는 실체가 있는 걸까?

신선 이야기는 대체로 뜬구름 잡는 수준이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대표적이다. 옛날 한 나무꾼이 우연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더니 백발노인 둘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나무꾼은 구경을 하다가 돌아가려고 했는데 곁에 세워둔 도끼자루가 썩어서 집을 수 없었다. 살던 마을도 완전히 바뀌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흐른 것이다.


민담에서 신선들은 인간과 동떨어진 세계에 산다. 그곳은 아예 시간의 흐름이 다른 별천지다. 그런데 드라마 속 도깨비, 도민준, 불로불사의 여인들처럼 인간계에 사는 신선도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전서’에 나온다. 그는 ‘조신선’이라는 인물의 전기를 썼다. 말 그대로 조씨 성을 가진 신선의 이야기였다.

정약용은 1776년과 1800년 두 차례 조신선을 만났는데 조금도 늙지 않고 사십대의 외모를 유지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들어보니 1756년과 1820년에도 생김새가 똑같았다며 놀라워했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고 나이 또한 헤아릴 수 없기에 조신선이라고 일컬었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이의 직업이었다. 조신선은 18~19세기 조선 땅에서 책을 수집하고 팔러 다니던 ‘서쾌(書儈)’였다. 그는 ‘뛰어 다니는 서점’이었다. 해가 뜨면 어디선가 나타나 바람처럼 달리면서 책을 팔았다. 관공서나 대갓집을 제 집 드나들 듯이 했고 과부의 집도 거리낌 없이 출입했다. 또 소매 속에서 책이 끝없이 나와서 꼭 마술을 보는 것 같았다.

조신선과 책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 그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책의 저자, 목차, 개요는 물론이고 누가 주해를 달았는지, 누가 소장하는 중인지 책에 관한 모든 내력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천하의 책을 다룬다고 자부했다. 고로 천하의 이치 또한 자기 손안에 있다고 믿었다.
“서쾌 조신선이라는 자는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 했는데 눈에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책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어서 마치 군자와 같았다.” (여유당전서)

어쩌면 조신선은 진짜 신선이라기보다 별명이나 브랜드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판매하는 사람이니까 직업상 재미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가 수십 년 간 똑같은 외모를 유지한 것도 상업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생김새가 닮은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특색 있는 분장을 하고 서적중개업을 했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이 서쾌는 당시 한양에서 꽤 유명인사였다. 심지어 주당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밥은 입에 안 대고 삼시 세끼 술로 배를 채웠다. 왜 밥을 먹지 않느냐고 묻자 불결해서 싫다고 했단다. 옛 사람들은 신선이 되려면 곡기(穀氣), 즉 밥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신선은 정말 신선이라서 밥 대신 술만 마신 걸까? 하기야 인간계에서 신선으로 살려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지.

역사 속에는 불로불사를 꿈꾼 인물들이 많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삼신산(三神山)에 사람을 보낸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삼신산이 우리나라의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황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춘추전국을 제압하고 천하를 평정한 진시황이지만 죽음만은 피하지 못한 것.

반면 드라마 ‘흑기사’에 나오는 불멸의 여인들은 다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돌아가 유한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지구상에 홀로 남는 외로움은 끔찍한 형벌이다. 그런 의미에서 늙어죽는 것은 축복이자, 진시황도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라고 볼 수 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옛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 집안에 불을 환히 밝히고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만약 잠이 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꺼렸다. 이 풍속을 ‘수세(守歲)’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묵은해와 새해는 하나로 이어졌고,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좌표를 찍는 일이다. 불로불사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삶은 더욱 절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