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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당신 없는 삶, 반쯤은 살고 반쯤은 죽은

<134> 이승희 시인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8.01.13 07:02|조회 : 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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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당신 없는 삶, 반쯤은 살고 반쯤은 죽은
한 사내가 울고 있다. 헤어진 당신이 그리워 물가에서, 식탁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파주에서 울고 있는 사이에 사내의 마음은 폐허가 되었다. 1997년 ‘시와사람’과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승희(1965~ )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당신과 헤어진 후의 죽음보다 깊은 슬픔과 우울한 내면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벽지 속에서 꽃이 지고 있다 여름인데 자꾸만 고개를 떨어트린다 아무도 오지 않아서 그런가 하여 허공에 꽃잎을 만들어주었다 나비도 몇 마리 풀어주었다 그런 밤에도 꽃들의 訃音은 계속되었다 옥수숫대는 여전히 푸르고 그 사이로 반짝이며 기차는 잘도 달리는데 나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꽃과 살았다 반쯤만 살아서 눈도 반만 뜨고 반쯤만 죽어서 밥도 반만 먹고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 나는 혼자서 꽃잎만 피워댔다 앵두가 다 익었을 텐데 앵두의 마음이 자꾸만 번져갈 텐데 없는 당신이 오길 기다려보는데 당신이 없어서 나는 그늘이 될 수 없고 오늘이 있어서 꼭 내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도 부음으로 견디는 날도 있는 법 아욱은 저리 푸르고 부음이 활짝 펴서 아름다운 날도 있다 그러면 부음은 따뜻해질까 그렇게 비로소 썩을 수 있을까


나는 같이 맨발이 되고 싶은 것
맨발이 되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으면
어디든 따뜻한 절벽
여기엔 없는 이름
어제는 없던
구름의 맨살을 만질 수 있지
비로소 나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세상에 없는 나를 만나는 일
이 불편하고 쓸쓸한 증명들로부터
더는 엽서를 받지 않을 거야
이 세상을 모두 배웅해버릴 테니
이건 분명해
견딜 수 없는 세계는 견디지 않아도 된다
창문에 매달린 포스트잇의 흔들림처럼
덧붙이다가 끝난 생에 대하여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그래서 좋은
-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전문


당신과 헤어진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여름이 시켜서 했다는 것은 아마 여름에 당신과 헤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당신과 헤어진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캄캄한 사연을 말”(‘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하고 싶지는 않다. 헤어진 이유나 사연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직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는 방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옥수숫대는 여전히 푸르고 그 사이로 반짝이며 기차는 잘도 달리는” 왕성한 계절인데, 나는 꽃처럼 시들어간다. 나의 반쪽인 당신이 없으므로 내 삶의 절반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이다. 내일도 없다.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마냥 기다리고 기다린다.

헤어지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탁에 마주 앉아 “당신은 낮을 가둔 밤을 이야기하고/ 나는 밤이 숨긴 낮에 대해 말”(‘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하며 마음의 거리를 좁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 거리(사이)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 “살면서 생기는 것/ 살아서 생기는 것”(이하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이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는 것이다.

이별은 뜻밖의 일인지라 “오늘도 마지막인 것처럼” 운다. 내가 원하는 건 서로 “맨발이 되어 신발을 가지런히 돌려놓”고 죽는 순간까지 같이 사는 것. 하지만 당신은 “여기에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극한 슬픔으로 “세상에서의 부재”, 즉 죽음을 떠올린다. 당신이 곁에 없는 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므로.

냉장고 문을 열고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따뜻한 불빛들이 막 생겨나서 손등이 붉어지도록 쓸쓸한 저녁. 너 없이 나는 못 산다고 말을 하던 저녁처럼 흐릿해. 사각의 반찬통들이 얌전히 앉아 있는 골목, 그런 마을, 폭설이라도 내릴 것 같아서

당신은 앞을 향해
나는 뒤를 향해 헤엄친다
전력투구로 마주 보는 시간이 생겨난다

우린 다 같이 외로웠으므로
식탁의 감옥을 꿈꾸었을 뿐

어떤 삶은 돌아갈 길을 절벽으로 만들며 나아가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앞을 향해
기울어진 틈에 서 있었을 뿐
식탁은 둥글고
당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다
식탁의 체위를 닮아가는 일은 슬픈 일이다
-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당신(가족)의 부재를 가장 절실히 느낄 때는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순간이다. 밥을 먹으려다가, 냉장고 문을 열다가 “너 없이 나는 못 산다고 말을 하던 저녁”이 생각나 운다. 당신이 만들어놓은 냉장고 안의 “사각의 반찬통”을 보는 순간 혼자만의 “식탁은 감옥”과 다르지 않아 또 운다. “당신은 앞”, “나는 뒤”를 향해 헤엄쳤으므로 사이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헤어짐의 결정적 원인은 결국 ‘외로움’이다. 서로 외롭게 놔둔 것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같이 사는 것인데, “당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으므로 사이를 좁힐 수가 없다. 비어 있는 화병을 보다가 “한나절을 보내고”(이하 ‘식탁의 오래된 풍경’), 울다가 “한 계절을 보내곤” 한다. 곡진한 그리움은 결국 몸에 병을 불러들인다.

표제시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에서 보듯, 외로움은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당신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공원은 그리움을 대리만족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내게 위안을 주는 공간이다. 시소를 타면 “내가 살던 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시소, 즉 삶이라는 것은 한 번 타면 “내릴 수 없는 세계”다. 내가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잊고 새로운 시소를 탄다는 것은, “어제의 시소는 녹슬고 오늘의 시소는 이미 낡았”으므로 의미 없는 일이다. “꽃 피는 집”도 이젠 없다.

그래도 살아야 하므로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잠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하 ‘파주 3’)이라 마음을 다진다. “오늘은 식탁에 물병을 놓”고, “조금 기운 식탁 자리 끝에 두 손을 공손하게 올리고” 혼자 밥도 먹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식탁 위에 별이 차려진다. 아닌 척, 잊은 척하지만 결국 별은 당신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잘살고 있다고 애써 안부편지를 보내지만 사무치는 그리움에 시집 한 권으로 꺽꺽 울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승희 지음. 문예중앙 펴냄. 128쪽/9000원.


[시인의 집] 당신 없는 삶, 반쯤은 살고 반쯤은 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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