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 'X맨' 아나요…"젊은 꼰대, 선배 갑질" 우려

이지혜 디자이너

서울 소재 대학교에 다니는 박모씨(20)는 새내기 시절인 1년 전만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낸 친구가 갑자기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이 '엑스맨'(X맨)이라고 밝힌 경험 때문이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박씨는 어렵게 마음을 연 상대가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상처를 받았다.


대학 입학 시즌이 다가오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환영회) 문화 중 하나인 엑스맨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선후배 간 친목을 도모한다는 기존 취지와 달리 신입생의 인권을 무시하는 '갑질'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추세다.

엑스맨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신입생인 척 행동하는 선배를 말한다. 대학가에서는 엑스맨을 '신입생이 학교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며 수년째 일종의 입학 이벤트처럼 여기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프락치'(첩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들은 합격자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이나 오리엔테이션부터 잠입을 시작해 개강을 하는 3월 초까지 신입생처럼 활동한다. 신입생 간 대화에 적절히 개입해 어색함을 풀어주고 학사일정 등의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의 동기가 실제로는 선배라는 것을 알게 된 신입생들이 느끼는 배신감이다. 선배들이 자신의 재미를 위해 신입생들의 인격을 무시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정보의 비대칭을 활용한 일종의 갑질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2년 전 엑스맨에 당했다는 대학생 이모씨(21)는 "신입생 동기끼리 한 말을 엑스맨이 퍼뜨려 분란을 조장한 일도 있었다"며 "'선배들이 못 노는 것 같다, 재미가 없다'는 말을 동기에게 했는데 알고 보니 엑스맨 역할을 한 선배였다"고 말했다.

대학생 이수빈씨(22) 역시 "(엑스맨은) 재미있는 추억도 아니었고, 그 역할을 한 선배와는 오히려 더 서먹한 사이가 됐다"며 "이런 활동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라고 말했다.

연초마다 엑스맨 논란이 계속되자 일부 대학에서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엑스맨 활동을 자제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려대 미디어학부는 자체 학생회 투표를 거쳐 올해부터 엑스맨을 아예 폐지하기로 했다. 서울대의 경우 단대별 자율에 맡기되 학생·소수자 인권위원회에서 엑스맨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과도한 행위를 제한하기로 했다.

서강대 중앙새내기맞이사업단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엑스맨 허용을 두고 이달 11일 단대별 투표를 진행했다. 다만 없애자는 의견이 전체 14표 중 4표로 과반에 못 미쳐 엑스맨 활용은 단대별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엑스맨 문화가 신입생의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다며 근절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선배와 후배가 1년 차이밖에 안 나더라도 갑을 관계로 느껴질 수 있다"며 "좋은 취지라도 후배가 감시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개선 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신입생이 자기 주도로 학사 계획을 세우도록 도와줘야 하는데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신분을 속이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일종의 '젊은 꼰대'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