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의 거인' 아쉬웠던 호암 30주기

“한.중 수교도 되지 않았을 때인 1980년대 말 책 100여권을 낑낑 대고 베이징으로 들고 갔습니다. 학술교류를 염두에 두고 베이징대에 기증하기 위해서였죠. 그쪽에서 책 내용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이달 초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배기동 박물관장이 들려준 얘기다. 그가 들고 갔다는 책은 지금은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힘든 삼성문화문고였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혼돈과 모순의 시대일수록 인간가치의 새로운 발견을 희구하게 된다’며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발간을 이끈 그 책 말이다.

특히 문고 1호로 발간된 독일 우국지사 피히테의 연설집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전후 독일국민의 정신혁명을 강조하며 당시 전쟁의 폐허를 겪고 재도약하려는 우리 국민정신의 현실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71년 12월 발간 당시 문고 한권값은 원가 250원에 못 미치는 70원이었고 그마저도 대학과 공공도서관에 기증할 때는 받지 않았다. 출판계에서는 당연히 반발이 따랐다. 돈많은 삼성이 출판계도 뒤흔든다는 질시도 자연스레 받았다.

하지만 책의 선택과 번역, 교정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국내 문인들과 학자들의 힘을 빌리면서 문화계의 토양은 튼실해졌다. 이들이 출판계의 기반이 된 것은 물론이다. 삼성문화문고 발간 사업은 문고본 도서의 몰락이 현실화된 1990년대 초중반까지 230여종에 1000만권 이상을 기록했다.

호암 이병철과 삼성의 손길이 간 것은 저술사업만이 아니었다. 1978년 준공된 호암미술관은 당시까지 동양 최대로 꼽혔고 국립중앙박물관과 미술관을 합친 규모로 비교됐다. 가야 금관, 청자를 비롯한 수많은 국보급 유물에 박수근, 이중섭, 이우환 등 국내 저명화가에다 로댕, 부르델 등 세계적인 조각가의 작품도 두루 포함됐다.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등 로댕 작품은 미술관의 자랑이었다.

호암은 자신의 개인소장 문화재를 재단에 기증해 사금고 속 유물이 아닌 박물관 전시품으로 국민들 앞에 내놓았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가 문화 후원자이자 세계적인 콜텍터였던 것은 분명했다. 1987년 타계한 호암의 30주기를 맞은 지난해 말 삼성쪽에 삼성문화문고의 재발간이나 문화계에서의 호암 재평가를 위한 학술행사 개최의사가 타진됐다. 병석의 아들과 옥중 손자의 처지가 감안되서인지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거부로서가 아닌 문화계의 지킴이로 인식되는 간송 전형필과도 아쉽지만 비교되는 대목이다. 간송 탄생 100주년인 2006년에 간송미술관은 수장고를 활짝 열고 미술사 1000년을 돌아봤다.

호암을 경제계의 거물 정도로 가둬두는 것은 문화계의 또다른 이병철과 전형필의 출현을 막는 단견은 아닐까. 아쉽지만 배기동 관장이 베이징대에 기증한 책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베이징대 등에 적을 둔 유학생을 수소문해봤지만 쉽지 않았고 전질은 삼성쪽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호암이 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내놓은 문고 발간취지의 한 대목이다. ‘재단이 존속하는 한 문고 발간 사업을 끈기있게 추진할 계획입니다’

배성민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