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당신의 혀가 내 마지막 숨결을 맛볼 때

2011년 '시인동네'로 등단한 홍순영(1963~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은 박박 문지르고 씻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슬픔과 미움의 감정으로 오랜 세월 고통스러워하는 내면을 상징화하고 있다. 잊고 싶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져 불안을 가중시킨다. 종이 위에 글씨를 쓰고 또 쓰면 무슨 글씨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것처럼, 색 위에 색을 한없이 덧칠하면 무채색이 되는 것처럼 고통의 진원과 감정은 철저히 감춰져 있다. 시집을 읽어가는 것은 덧칠한 색을 하나씩 벗겨내 처음 백지에 쓴 글씨를 찾아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표제시 '환승'에서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만약 꽃이 가족을 상징한다면, "개화와 낙화를 한날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날에 누군가 태어나고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다. "꽃 누운 자리에 흩어진 노란 재에서" 나는 "유황냄새"는 죽음을 의미하고, 그 죽음이 나와 관계가 있기에 "나는 꽃의 바깥", 즉 가족의 바깥에 외롭게 머문다. 내 고통과 슬픔의 진원은 '나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다. '속죄양'인 나는 "죄를 하나 그리고/ 예쁘게 색칠"(이하 '죄는 왜 지워져야 하나')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죄, 즉 "지워지지 않는 피로" 그린 그림이므로 "이제껏 그려온 죄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원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쁜 숨결 뱉으며 월경"을 하고,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붉고 매캐한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칼을 쥔 자와 지켜보는 자
난폭한 백열전구 밑
긴장이 흐르는 도마 위에이 무대를 신선하게 빛내줄 내가 있다
이곳에서 싱싱함이란, 죽음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아무도 예를 갖추지 않는 죽음 앞에서
횟집 남자는 염을 하듯 두어 번 내 몸의 물기를 걷어낸다

차디찬 도마에 누워 바라보는 시선들이란
뚝, 뚝, 물기처럼 떨어지는 식욕과
조급해진 칼날의 눈빛 같은 것

끈질기게 쫓아온 여자의 시선에
불안하게 반짝거리는 비늘
바다를 떠날 때부터 나는 이미 빛을 놓친 것이지만
한 줄기 위안처럼 더 선명히 떠오르는 푸른빛의 황홀함
옷자락을 끌며 아련히 사라지는 빛이여
나는 아주 천천히, 저편으로 건너가려 한다

누군가의 혀에 닿을 때까지
스스로의 죽음을 바라보도록 오랫동안 눈뜨는 법을 배웠던 기억
나를 휘감았던 빛을 떠올리며 깊은 숨을 몰아쉰다
당신의 혀가 극에 달한 마지막 숨결을 맛본다

모든 미각은 고통의 눈을 감기고서야 눈을 뜬다
- '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 전문

시 '고통이 미각에 닿기까지'의 화자는 횟감용 생선이다. 인간의 입장이라면 '신선한', '싱싱한'이라는 형용사가 앞에 붙어야 마땅하겠지만 죽음을 앞둔 횟감용 생선 입장에서는 한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내 목숨을 산 "지켜보는 자"나 곧 내 숨을 끊을 "칼을 쥔 자"는 내 고통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대상이지만 "바라보는 시선들" 또한 나를 "죽음의 에스컬레이터"에 태운 이들과 다르지 않다. 다 한통속이다. 나의 불행(죽음)은 "바다를 떠날 때", 즉 삶의 근거를 떠날 때부터 예정된 것이다. 빛만이 유일한 구원이지만 "나를 휘감았던 빛"은 "아련히" 사라져버렸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의 고통을 즐기고 있다. 그것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누구나 활짝 핀 꽃을 생각할 때
졸음에 겨운 너도 있다는 걸 기억해

어느 곳에선 칠백 년 된 잠을
어느 곳에선 이천 년 묵은 잠을 들추며
사람들은 연꽃 분홍 뺨을 바람에 내주었지만
그 옛날 굳을 대로 굳어 딱딱해진 시간
그 속내를 알게 뭐람

껍질 속에서 잠을 키우는 씨앗
그 잠 속에 자라는 것도 이쪽 세상인지

이곳의 꽃들은 다 무사하려고 해
햇빛 아래 모두 원색주의자가 되려 해
비를 맞으며 분열하려고 해
간혹 어떤 것은
처음 만난 세계 앞에서
발이 부르튼 뿌리를 생각하지
그것은 아주 잠깐의 눈부심

오래된 것들은 대부분 흙투성이 맨발로 오지
그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하면 뭐한담
바깥은 온통 외발자전거
나는 두발자전거도 못 타는데
넘어지려다, 기어코 넘어져

헤어지기 전 네게만 알려주는 비밀이야
이쪽 세상으로 건너오는 법
- '경실(硬實)' 전문

왜 나만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똑바로 서 있"(이하 '기울어진 세계')는데, "흔들리지 않으려고/ 난간까지 잡았는데" 그래도 사람들은 나를 "한쪽으로 기울었다"고 한다.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똑바로 살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삐딱하게"만 본다. 하지만 "계절의 입구와 출구가/ 다 아귀가 맞지 않"다는 것을, "누구도 기울어지지 않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긴 망각의 숲에서 경실(硬實)의 상태에서 깨어난다. 경실(硬實)은 종피가 단단하여 발아가 어려운 종자로 식물이 나타내는 휴면현상의 하나를 가리킨다.

내 고통과 상관없이 "누구나 활짝 핀 꽃을 생각할 때" 나는 "졸음에 겨운 너도 있다는 걸 기억"한다. 시 '환승'이 유년의 통과의례라면 시 '경실(硬實)'은 오랜 고통의 잠에서 깨어나 "아주 잠깐의 눈부심"이지만 '빛의 세계'로 건너오려는 중년의 통과의례다. 종피에 인위적인 상처를 내 발아를 촉진하는 것처럼 "그 옛날 굳을 대로 굳어 딱딱해진 시간"을 깨는 것은 "넘어지려다, 기어코 넘어져" 상긴 상처다. 새로 생긴 상처가 오랜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로 인해 "스스로 안과 밖이 되어 겹겹이 여며지던"(이하 '양배추') 방에서 나와 "환한 조명 아래 깊숙이 배"일 수 있다. 또한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던 소리(소음)와 죽음의 상처 덧나게 하던 "꽃과 나무와 새들"('화각(華角)')에게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더 이상 슬픔과 미움의 감정에 덧칠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까지만 함께 걸어갈=홍순영 지음. 문학의전당 펴냄. 120쪽/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