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멍드는 폭력… '가스라이팅'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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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친구 B씨와 그의 남자친구의 관계를 볼 때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다. B씨의 남자친구는 "다리가 드러난다"며 B씨에게 치마는커녕 찢어진 청바지도 입지 못하게 강요한다. B씨가 치마라도 입는 날이면 남자친구는 "여자가 헤프다"며 B씨에게 거칠게 화를 낸다. 길들여진 B씨는 남자친구가 너무한 것 아니냐는 A씨 말에 오히려 "남자친구의 말이 맞고 자신이 틀린 것 같다"며 남자친구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C씨의 직장 상사는 C씨의 감정이나 능력을 무시하기 일쑤다. 부당한 처사를 받은 데 대해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직장 상사는 "예민하게 굴지 좀 마라", "이게 다 당신이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라며 C씨를 나무란다. 요즘 C씨는 상사의 말처럼 정말 예민하고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느낀다.


연인 관계뿐 아니라 여러 사회적 관계에서 신체적 폭행이 일어나는 데 대한 사회적 반감이 거세지는 추세다. 일각에선 단순히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멍들게 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스라이팅은 '가스등'(Gas Light·1938)이라는 연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상황 조작으로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그 사람의 정신을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해당 연극에서 남편은 가스등을 일부러 어둡게 한 후 부인이 이를 지적하면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부인의 현실인지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게 해 판단력을 낮추고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든다.

가스라이팅 학대 방법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피해자의 의견을 거부하거나 이해하지 않는 것(거부) △피해자의 기억을 불신하는 것(반박) △피해자의 생각을 의심하는 것(전환) △피해자의 요구나 감정을 하찮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경시) △가해자가 실제로 발생한 일을 잊은 척 하거나 부인하는 것(망각) 등이다. 이러한 행위가 점진적으로 이어지면서 피해자는 자존감이 낮아지고 가해자의 생각에 동조하게 된다.

◇기울어진 권력 관계에서 빈발
가스라이팅은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하고 동등해야 할 관계가 소위 '갑' '을'관계로 변질되며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권력적 통제 우위를 바랄 때 흔히 발생한다. 사회가 더 이상 폭력을 용인하지 않게 되자 이를 대체할 폭력의 수단으로 정신적 통제를 행하는 것이다. 특히 연인 관계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이 같은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가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성인의 데이트폭력 가해 연구'에 따르면 총 2000명의 조사 대상 중 1593명(79.7%)이 연인의 행동을 통제하는 등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통제행동'을 가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원하지 않는 행위를 강요한다거나 자신의 생각이 맞다며 합리화하는 식이다.


이러한 가스라이팅은 연인 관계 외에 부모 자식 사이, 친한 친구 사이, 직장 선후배 사이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도 빈발한다. 권력적 우위를 바탕으로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억지로 주입하는 행위나 직장 상사가 후배를 수월하게 다루기 위해 자존감을 건드는 행위 등도 모두 가스라이팅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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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구조
언뜻 보면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는 개인적인 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결국 가스라이팅도 우리 사회의 문화·구조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이현혜 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뿌리 깊게 박힌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권력의 차이와 정신적 폭력에 대한 인식 부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정신적 통제'를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기 때문에 가해자도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피해자가 처음에 저항하더라도 경제, 지위, 연령 등에서 발생하는 권력 차이를 이길 자신이 없고,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치부하는 주변의 시선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임명호 단국대학교 심리학 교수 역시 우리 사회의 성취 지향적이고 경쟁 지향적인 문화에서 가스라이팅의 원인을 진단했다. 임 교수는 "가족, 연인, 직장 선후배 관계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관계로 인식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런 관계에서까지 우열을 따지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도 '내가 이 관계에서 성취한 권력을 잃고 을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쌓여 정신적 학대를 통해 상대를 짓누르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계를 존중할 줄 알아야
전문가들은 결국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의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대화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인숙 건국대학교 여성학 교수는 "정신적 통제는 더 큰 폭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면서 "남녀를 비롯해 모든 관계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혜 교수는 가해자와 주변인 모두가 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회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건강한 관계를 바라보는 일관된 교육이 부족하다"며 "가정이나 학교에선 이러한 정신적 폭력이 나쁘다고 가르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이를 미화해 괴리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임명호 교수 역시 "(가스라이팅)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최근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사회적 이슈가 돼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듯, 정신적 폭력의 문제를 스스로 인지하고 자정할 수 있는 공감대를 꾸준히 형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