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타·커피·똠양꿍만 줄줄이…한국 없는 한옥마을

서울 종로구 익선동 165번지 일대의 한옥 밀집지역에 동남아 음식점(왼쪽), 커피숍(오른쪽) 등이 들어선 모습이다. / 사진=이예은 인턴기자

'이탈리안 레스토랑→카페→펍(Pub·영국식 선술집)→브런치 카페→동남아 레스토랑'

이달 14일 찾은 서울 종로구 익선동.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국적인 분위기의 음식점과 카페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익선동 일대는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 밀집지역으로 이름 났지만 정작 전통문화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옥의 기와지붕과 목조 뼈대만 남기고 현대식으로 탈바꿈한 건축물들이 소비자를 유혹할 뿐이다.

최근 서울시가 익선동을 한옥마을로 지정하려는 가운데 지나친 상업화 우려가 나온다. 개성 있는 상점들로 낙후된 지역에 활력이 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한옥마을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서울시는 올해 익선동 165번지 일대(3만1121㎡)의 한옥마을 지정을 추진 중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익선 지구단위계획구역 및 계획 결정(안)'의 주민 공람을 진행한 데 이어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의 안건 심의를 준비하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한옥 주거단지로 조성됐다. 익선동 한옥은 총 119채로 그 수가 적지만 밀집도(총면적에서 한옥이 차지하는 비율)는 30.7%로 북촌 7.3%, 서촌 7.8%보다 커서 보존가치가 높다.

한옥마을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은 무분별한 개발이 제한되고 서울시로부터 한옥 유지·관리를 위한 지원금(약 1000만~80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규제와 함께 예산을 지원해 한옥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를 보호한다는 취지다.

익선동 한옥마을 지정이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이 일대에서 전통문화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수년 전부터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로 상업화가 진행돼 이미 전체 한옥 가운데 31.4%(37채)만 주거용이고 나머지는 음식점(33동, 28.0%), 상점(18동, 15.3%), 카페(14동, 11.9%) 등이다.

서울시에서 한옥마을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익선동 165번지 일대 한옥 밀집지역의 모습. / 사진=이예은 인턴기자

이마저도 대부분 전통문화와는 무관하다. 익선동 음식점 20곳을 확인해본 결과 한식당은 4곳에 불과했고, 카페도 14곳 가운데 전통찻집은 1곳에 그쳤다.

직장인 이주영씨(32)는 "한옥을 고쳤다는 것 외에는 경리단길, 연남동 같은 곳들과 특별한 차이점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외국인 친구에게 한국적인 것을 소개하기 위해 데려오면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한옥마을로 지정됐던 북촌과 서촌, 전주의 한옥마을도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기존 상권 내몰림) 등 상업화 홍역을 앓았다. 이미 비슷한 조짐을 보이는 익선동이 한옥마을로 지정된다면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기존 영세 상인들의 부담이 크다.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평당 6~7만원이 임대료였는데 슬금슬금 오르더니 평당 15만원까지 왔다"며 "북촌이 평당 20만원이라 아직은 상대적으로 싼 편이지만 추세가 너무 빨라서 조금만 더 있으면 평당 20만원까지 갈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지역 활성화 수단으로 일정 부분 상업화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양병헌 서울시 역사도심재생과장은 "(익선동 지역은) 도시행정사업으로 개발하려던 지역이라서 원래는 다 허물고 사무용 건물이나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추진했던 곳"이라며 "한옥을 지킨다는 측면에서는 상업화로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지면 명소가 되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많은 한옥마을이 상업적으로 흐르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김형규 홍익대 건설도시공학부 교수는 "한옥은 물리적 형태만 남고 그 안에 서양의 문화가 결합한 형태로 공간이 활용되고 있어 전통이 지켜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한옥의) 용도 보존을 어떻게 할지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덕 전북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소비자들이 한국적인 것에 비(非)한국적인 것을 섞는 것을 어느 정도는 용인하지만, 전통이 너무 망가지면 그때는 찾지 않을 것"이라며 "한옥마을이 전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향수를 충족시켜주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즐거움도 주는 결합적인 장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