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지 않는 돈' 요구불예금 회전율 31년 만에 최저

돈을 풀어도 가계나 기업에 돌지 않는다. 지난해 예금회전율, 통화승수 등 유동성 관련 지표가 모두 역대 최저치에 가까운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각에선 혈액이 몸 속에서 순환하지 못하는 동맥경화에 빗대 돈이 소비·투자로 이어지지 못하는 '돈맥경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18일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에 따르면 지난해 예금은행의 요구불예금회전율은 월 평균 19.1회였다. 연간 기준으로 역대 최저치였던 1986년(18.4회) 이후 31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예금회전율은 예금지급액을 예금잔액으로 나눠 구한다. 요구불예금은 적금 등 저축성예금과 달리 언제든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다. 이런 요구불예금의 회전율이 하락했다는 것은 경제주체들이 예금을 인출해 쓰기보다는 은행에 예치해 두는 경우가 늘었다는 의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30회를 넘었던 월평균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2010년을 정점으로 점차 하락하며 지난해 20회 아래로 내렸다.

이같은 현상은 다른 지표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지난해 통화승수는 16.3배로 연간 기준 역대 최저치로 집계됐다.


통화승수는 한은이 공급한 본원통화가 얼마나 많은 시중통화량(M2)을 창출하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2008년만 해도 한은이 1원을 공급하면 시중 통화량은 26.2원이 됐으나 지금은 16.3원이 되는 데 그친다는 뜻이다.

7일 오후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오만원권 지폐를 살펴보고 있다. 2017.8.7/사진=뉴스1

한은은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전까지 저금리 상태를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돈이 좀처럼 돌지 않으면서 통화정책의 경로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론상으론 금리 인하가 이뤄지면 돈이 더 활발히 돌며 소비와 투자가 늘어야 한다.

김동원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우리 경제의 맥박이 떨어지고 있다는 의미"라며 "금리 인하로 시중에 돈을 풀었지만 근본적으로 상품·자본시장의 역동성이 떨어져 경제활동을 촉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반면 한은은 이같은 현상이 통화정책의 효과가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은은 지난해 국정감사 당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본원통화보다 M2가 늘어나는 속도가 더딘 데 대해 "2009년 5만원권 발행 이후 10만원 자기앞수표를 대체하면서 본원통화의 약 60%를 차지하는 화폐발행잔액이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만원권 발행효과를 제외하면 통화승수는 2009년 이후에도 좁은 범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다.

또 완화적 통화정책에도 일부 경제주체들이 자금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은 통화정책 효과 약화보다는 은행들의 대출태도가 강화된 데 원인이 있다고 봤다. 금융기관들이 신용차별화에 나서면서 일부 저신용 중소기업이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