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에 전화했는데 '女아이돌'이? 비즈링이 뭐길래

삽화=임종철 디자이너 기자

정부 산하 공공기관에 다니는 강모씨(31)는 이달 초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했다. 남자친구 휴대폰에 전화를 걸때마다 들려오는 회사 소개 통화 연결음이 맘에 들지 않은 탓이다. “왜 전화를 걸 때마다 제품을 소개하는 여자 아이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냐”며 화를 냈지만, 남자친구는 회사의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개인 휴대폰의 통화 연결음을 이용해 회사 홍보를 강요하는 일부 기업의 행태에 직장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모호한 공과 사의 경계를 파고드는 회사의 간섭은 일종의 갑질이라는 지적이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상당수 기업은 수년 전부터 기업 홍보 멘트나 로고송을 전화 수신자에게 청각적인 광고 형태로 전달하는 통화 연결음 ‘비즈링’(biz-ring)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존 음악만 나오던 컬러링을 비즈니스 형태에 적합하게 바꿨다. 불특정 다수에게 회사나 제품의 홍보가 가능하고, 임직원에 소속감도 고취할 수 있어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기업이 비즈링을 업무용이 아닌 임·직원의 개인용 휴대폰까지 강제하는 경우다. 비즈링 설정은 업무상 권고 형태로 내려오지만, 실적을 집계하고 있어 이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다.

직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휴대폰 번호를 수집해 일괄적으로 비즈링을 적용하는 기업도 적잖다. 한 이동통신업체의 경우 법인 번호를 부여하고 요금을 내주며 비즈링을 설정하도록 했지만, 단말기는 직원들이 직접 마련하도록 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가전제품 제조업체에 다녔던 직장인 임모씨(32)는 “전 직장에서는 번호를 걷어 제품을 홍보하는 통화 연결음을 설정했다”며 “안 그래도 회사 업무로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개인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형 유통업체에 근무하는 이모씨(31)는 “유통업계에서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상품권 판매를 유도하는 통화 연결음을 설정하도록 한다”며 “전화를 걸어온 친구나 지인들이 연결음 내용으로 약 올리기도 해서 민망했다”고 말했다.

공무원 조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각 지자체는 직원들에게 동절기를 맞아 산림청에서 배포한 산불예방 비즈링을 설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한 지자체 공무원 김모씨(54)는 “강요는 아니지만 통화 연결음을 설정한 사람을 점검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설정하지 않은 사람도 가려지는 구조”라며 “대국민 서비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업의 행태가 근로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right to disconnect)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날로 다변화되는 근로의 형태를 포착해 개인의 권리를 지키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됐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근무시간 외에도 그런 것을 강요하면 회사 측의 일방적인 사생활 침해나 갑질로 볼 여지가 있다"며 "개인이 쉽게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개인 휴대폰까지 비즈링을 넣어 소속감을 표하는 것은 근로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어 자제돼야 한다"며 "일하는 문화가 계속 바뀌어 가는 것에 맞춰 입법자들이 근로자를 보호하는 알맞은 방식을 업데이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