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디테일을 벗긴다...건축가·교수·화가가 모여 만든 '건축과학 수사팀'

2014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 현장을 가상으로 재현한 모습. /사진=포렌식 아키텍처.

2006년 4월6일. 독일 헤센주 카셀의 한 인터넷 카페. "탕, 탕" 두발의 총성이 울렸다. 터키계 독일인 청년 할리트 요즈가트(21)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네오나치(백인우월주의) 일당이 벌인 9번째 인종차별 살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특이했던 건 헤셀주 정보국 요원 안드레아스 테미가 사건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임무가 극우파들의 범죄활동 감시였던 그는 총격 당시 바로 옆방에서 태연하게 인터넷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경찰은 테미를 네오나치 범죄에 연관된 혐의로 체포했다. 이후 현장 CCTV를 분석한 결과 그가 계산대에 서있었지만 바로 뒤에 피해자가 쓰러진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은 장면이 확인됐다. 그걸로 끝이었다. 9개월간 수사에도 추가 증거가 나오지 않자 그가 현장에 있었음에도 총격 소리를 듣거나 시체를 보지 못한 것으로 수사는 종결됐다.

찝찝한 뒷맛만 남기고 끝난 사건은 지난해 4월 요즈가트 사망 11주기에 맞춰 민간인들에 의해 전말이 밝혀지게 된다. 바로 이스라엘의 건축가이자 작가인 이얄 와이즈만 등 영국의 20여명 교수, 건축가, 화가, 디자이너, 음향 전문가들이 모여 만든 연구단체 건축 과학수사(포렌식 아키텍처·Forensic Architecture)가 밝혀낸 것이다.

사건현장의 건축물을 재구성하는 것은 건축가들이 맡았다. 또 카페 인테리어를 똑같이 구현하는 것은 화가와 디자이너들이 맡았다. 이렇게 해서 실물 크기의 범죄현장이 만들어졌다. 두발의 총성은 소리 전문가들이 판독했다. 총에 소음기를 끼고 있어도 테미 요원이 충분히 들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 테미 요원이 총이 발사된 후 화약 냄새를 못 맡을 확률도 거의 없었다. 소리와 냄새로 꼬리가 잡힌 것이다.


이 단체는 비정부기구(NGO)와 인권 변호사들과 협업해 사정기관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건의 실마리를 푼다. 카셀 사건처럼 실제 모형을 구성하기도 하고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가상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사건현장의 설계도면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재구성한다. 경찰의 카메라영상이나 핸드폰 촬영영상부터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현장 사진 등에서 데이터를 얻는다. 프로젝트 하나 진행하는데 걸리는 시간만 족히 1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2000발의 폭격을 단행해 2200여명이 숨지고 1만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014년 8월1일. 포렌식 아키텍처와 국제앰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군사작전 데이터를 통해 공격 패턴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민간인 지역에도 무차별 폭격을 가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면 카셀 사건은 포렌식 아키텍처의 결과 발표 이후에도 재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정부가 사법기관의 수사 결과를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와이즈만 교수는 "우리 연구 결과는 테미 요원을 재판대로 올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유죄를 선고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라며 "사건의 의구심을 해결하고 이를 공개하고자 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