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집권 가는 길, '왕치산' 카드 다시 꺼낸 시진핑

"부강하고 민주적이며, 문명적이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회주의 현대화 강대국 건설을 위해 노력하겠다"


17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국가 주석으로 재선출된 시진핑 주석이 헌법 법전에 손을 얹고 이같이 선서하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중국 중앙방송(CCTV)에선 일부 전인대 대표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방송했다. 국가 주석 임기 제한을 풀고 장기집권의 길을 연 시 주석이 압도적인 지지로 자신의 두 번째 임기에 들어선 것이다.

이날 전인대에선 시 주석 만큼이나 관심을 끈 인물이 있다. 당 최고위직인 정치국 상무위원 퇴임 5개월만에 다시 국가부주석으로 복귀한 왕치산 전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기율위) 서기다. 시진핑 집권 1기(2012~2017년) 부정부패 척결을 진두지휘하면서 사실상의 2인자 역할을 했던 그가 시 주석의 절대권력을 안착시키는 과정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주목된다.

◇시진핑 주석-왕치산 부주석 체제 출범 = 중국 전인대는 17일과 18일 전체회의를 열어 국가주석과 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전인대 상무위원장, 국무원 총리, 국가감찰위원회 주임 등 국가 최고위직을 선출했다. 시 주석은 만장일치로 국가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재선출됐고 리잔수 정치국 상무위원도 전원찬성으로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올랐다.

관심을 모았던 왕 전 서기 역시 찬성 2969표, 반대 1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국가 부주석에 올랐다. 왕 전 서기가 받은 반대표 수는 역대 국가부주석 2003년 쩡칭홍(반대 177표, 기권 190표), 2008년 시진핑(반대 28표, 기권 17표), 2013년 리위안차오(반대 80표, 기권 37) 선출 때 나온 반대표보다 훨씬 적다. 중국의 설립자인 마오쩌둥 이후 가장 강력한 1인 권력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되는 시 주석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일에는 리커칭 국무원 총리가 재선출되고, 신설되는 국가감찰위원회(감찰위) 주임에 양샤오두 기율위 부서기 겸 감찰부장이 선출됐다. 기존의 감찰부, 국가예방부패국 등을 흡수해 만들어지는 감찰위는 당 기율위의 감시를 받는 공산당원 외 비당원 공무원까지 감찰 대상으로 하는 거대 반부패 기구다.

양샤우두의 감찰위 주임 선출은 예상을 뒤엎는 것이다. 당초에는 기율위 서기를 맡고 있는 자오러지 정치국 상무위원이 선임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양샤오두와 기존의 반부패 사령탑인 자오러지간의 역할 분담에도 관심이 모아지게 됐다. 양샤오두는 시 주석이 2007년 상하이시 당 서기로 재직할 때 상하이시 통전부장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 10월 19차 당 대회에서 당서열 25위 내에 드는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에 오르면서 실세임을 입증했다.

◇장기집권 길, 왕치산 카드 또 빼든 시진핑 =시 주석의 하방 때부터 시작해 50년 가까운 인연을 이어온 왕치산은 시진핑 집권 1기 '핵심 인사'다. 부정부패 척결을 진두지휘하면서 시 주석의 절대권력 기반 마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거물급 정적들이 왕치산의 반부패 칼날에 날아가면서 상대적으로 집권 기반이 약했던 시 주석은 단기간에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시진핑의 오른팔' '사실상의 2인자'로 불렸던 배경이다.

왕치산의 재기용은 70세의 고령임에도 그가 여전히 시 주석에게 유용한 카드임을 보여준다. 헌법 개정 등을 통해 장기 집권 기반을 마련한 시 주석은 내부 불만을 무마하면서 자신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새로운 정치지도를 그려야 한다. 언제까지 집권할지, 후계자는 어떻게 할지 풀어야할 숙제가 하나둘이 아니다.

대외적으로도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목표를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세계 최강국 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마찰이 커질 수밖에 없다. 험난한 앞길을 헤쳐가는 데 능력과 경험, 영향력, 충성도 등을 두루 갖춘 '오른팔' 왕치산을 포기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왕치산은 시 주석보다 5살이 많아 차기 주자가 될 수는 없다"면서 "권력을 나누면서 큰 그림을 함께 그리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라고 말했다.

◇왕치산, '외교사령탑+ 알파' 역할할 듯 = 중국에서 국가부주석은 상징적인 자리 성격이 강했지만 최고 실세로 평가 받는 왕치산의 취임으로 위상과 영향력이 달라질 전망이다. 왕 부주석은 우선 리위안차오 전 국가부주석이 맡았던 공산당 중앙외사영도소조 부조장을 맡아 외교 부문을 총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중앙외사영도소조는 시 주석을 조장으로, 중국 대외전략과 방침을 결정하는 '외교 사령탑' 역할을 한다.

중국에서 외교는 미국과의 무역 갈등에 대처해야 하는 등 갈수록 중요성이 높아지는 분야다. 왕치산은 당 기율위를 맡기 전까진 20여년 동안 경제·외교 분야에서 경험을 쌓아 이 부문에도 일가견이 있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2년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대유행 등 위기 때마다 '소방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는 부총리로서 미국과의 전략경제 대화를 이끌면서 미국 외교가에서도 협상력을 인정할 정도로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왕 부주석의 영향력이 외교 부문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도 많다. 반부패 숙청에 앞장섰던 그의 존재만으로 반대 세력들에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은데다 시진핑 1인 권력이 공고화되는 시점에서 당정간의 업무 조정, 정치 계파간 역할 조율과 새판짜기 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일반당원인 왕 부주석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당 중심의 중국 정치 시스템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당장 그는 정부보다 위에 있는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나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공식 멤버가 아니다.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공식 채널이 아닌 간접 채널이나 비공식 경로를 통해야 한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