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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나의 바닥은 '당신'

<143> 박완호 시인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8.03.24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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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나의 바닥은 '당신'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한 박완호(1965~ )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를 읽다보면 '내 삶은 바닥'이라는 중년 사내를 만날 수 있다. 그저 평범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사내가 갈구하는 사랑은 늘 '저만치' 떨어져 있다. 사랑은 불현 듯 떠나고, 또 새처럼 떠나려 하고 있다. 사랑의 결핍과 상실이 오히려 그의 시를 지탱시켜주는 힘인 동시에 외롭고 쓸쓸한 삶의 원천인 셈이다.

단 하나의 새를 멀리 날려 보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나뭇가지가 아리게 떨려오기 전에 새의 무게를 비워내야 합니다.

새가 맘 편히 떠나도록 햇빛그물이 더 성글어질 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새가 단숨에 날아오를 수 있게 아직은 가지의 탄력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먼 길 가는 새를 위해 벌레 앉은 이파리 하나쯤 살짝 흔들어도 되겠지요.

텅 빈 자리를 견디려면 새의 그림자까지도 훨훨 날려 보내야 합니다.

가도 가도 아직 날아갈 곳이 남은, 단 하나의 새를 위해 허공의 담장을 허물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매듭으로 새를 묶어두려 하지 말고 남은 한 올의 마음까지 다 풀어내야 합니다.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하나뿐인 이름을 하얗게 지워야 합니다.

단 하나의 새라는, 그 기억마저 온전히 지워내는 순간까지는

나에게로 오는 문을 잠가야만 하는, 지금은 귀먹고 눈멀기 참 좋을 저녁 무렵입니다.
- '새를 떠나보내는 저녁 무렵'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나무다. 많은 새들이 나무에 깃들여 쉬고 갔다. 이제 "단 하나의 새", 즉 다 떠나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이 남았는데, 그마저도 곁을 떠나려 한다. 나무의 의지와 상관없이 새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가려 한다. 다른 나무에 둥지를 틀려 한다.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무는 "아리게 떨려오"는 슬픔을 들키기 않으려 "새의 무게", 즉 마음을 비우려 한다. 심지어 "새가 맘 편히 떠나도록" 기다려주고, "단숨에 날아오를 수 있게 아직은 가지의 탄력을 붙들고 있"고, "벌레 앉은 이파리 하나쯤 살짝 흔들"고, "허공의 담장을 허물"기도 한다.

아마 많이 설득하고 사정했을 것이다. 더 이상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두 목숨"('아내의 발')임을 알기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떠나보내려는 것이다. 아니 새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하나뿐인 이름을 하얗게 지"우고, "단 하나의 새라는, 그 기억마저 온전히 지워내"고, "나에게로 오는 문"마저 잠그는 것이다. 이름과 기억을 지우고, 문을 잠그는 것은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는, 꼭 돌아오라는 애원의 다른 표현이다. 역설이다. 새가 다른 나무에 머무는 동안은 온전히 귀 막고 눈 감고 견뎌야 한다. "사랑이라는 매듭으로 새를 묶어두"지 않으려는 나무의 사랑은 유행가 가사 같기도 하고,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처럼 지고지순(至高至純)하기도 하다.

나는 급소가 너무 많다
감추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다
툭하면 자리가 바뀌는 탓에
어디가 급소인지 깜빡할 때도 있다

아까도 한방 제대로 맞았지만
어제의 급소는 말짱한 대신
난데없는 헛손질이 그만
오늘의 급소를 건드렸다

바로 거길 가려야 해
가장 치명적인 곳, 하지만
벼락은 늘 낯선 자리에 와 꽂힌다

오래전 내 급소는 엄마였다
엄마란 말만 들어도 죽고 싶었던,
죽는 게 꿈이었던 날들

엄마를 지나 아버지를 지나 또 누구누구를 지나
자꾸 급소가 바뀌어 간다

이제는 급소가 너무 많아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이는,
아무 데도 없는 것들 때문에 아파질 때가 있다 지금은

얼굴 없는 당신이 가장 치명적인 급소이다
- '급소' 전문


이 시에서 급소는 사랑의 부재와 상실을 뜻한다. "오래전 내 급소"인 엄마는 "마흔셋 한창 나이"(이하 ‘담’)에 돌아가셨다. 아내를 여의고 혼자된 아버지는 "환갑도 못 채우고" 아내의 산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자꾸 급소가 바뀌"고, "이제는 급소가 너무 많"은 상처투성이 삶이지만 "가장 치명적인 급소"는 "얼굴 없는 당신"이다. 내 곁을 떠나려 하는(혹은 떠난) 당신으로 인해 생긴 급소는 치유불능이다. "막내가 세상을 떠난 줄도 모르"(이하 '장모')는 장모를 모시고 살지만 "아내는 또 아내대로/ 어제처럼 다가올 미래를 말없이 건너"갈 뿐이다. "죽는 게 꿈"인 날들의 연속이다.

그늘 아래 그림자를 떨구고 가는 새가 발음되지 않는다. 머릿속을 맴도는 사람의 이목구비가 흐릿해진다.

구름이 바뀌기 전의 얼굴을 복원하지 못하듯, 거울 속의 사람도 아까의 표정을 또 짓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 제 그림자를 부려놓고 간 새는 어디쯤 날고 있을까?

나뭇가지에 또 날아와 앉은 새가 제 무게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갑자기 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목구비가 지워진 그늘, 새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 '새' 전문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도 시간이 흐르면 감정이 무뎌지는 법이다. 부모님도, 품안의 자식도 내 곁을 떠나면 삶은 '바닥'이다. 하여 "하나뿐인 生을 기꺼이,/ 재빠르게 탕진할 수 있"(이하 '바닥')을까 궁리한다. 사랑하는 "당신은 항상 바닥의 나를,/ 나의 바닥을 바라보려 하"지만 나의 바닥은 결국 '당신'이다. 당신으로 인해 나의 삶이 바닥으로 추락했고, 그 바닥에는 당신이 존재한다. "비탈 앞에서 제자리를 맴돌"('둥글고 붉은,')고 있는 것이다.

'새를 떠나보내는 저녁 무렵'의 후속 작이라 할 수 있는 '새'는 좀 더 냉정해진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번 떠난 사랑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연신 헛손질만 해대는 그림자 하나 밤새 꽃나무 아래를 서성"('목련의 사내')거리며 날아간 새를 기다렸다. "머릿속을 맴도는 사람의 이목구비가 흐릿해"지고, "제 그림자를 부려놓고 간 새는 어디쯤 날고 있을까" 궁금해질 무렵 새가 다시 날아들었지만 "갑자기 새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상처는 깊고도 깊다. 사랑은 서로 매듭으로 묶여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인 것이다. 새가 날아간 "허공에서 핏물"('삼월')이 흘러내린다.

◇기억을 만난 적 있나요?=박완호 지음. 문학의전당 펴냄. 120쪽/9000원.

[시인의 집]나의 바닥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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