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은 여기 있었네… '할아버지 택배' 아세요?

12일 택배 배송을 위해 주민에게 전화하고 있는 어르신 택배기사 최병운씨 /사진=남궁민 기자

"처음에는 실수도 하고 주민들도 불만이 있었죠. 이제는 단지에서 만난 주민들이 먼저 인사하고 저도 아이들 만나면 가끔 사탕도 줍니다. 가족 같아요" (어르신 택배기사 최병운씨)


전국에서 '택배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다산신도시의 한 아파트에서는 단지 내 안전을 위해 택배차량 진입을 금지해 논란이 일었다. 이 같은 갈등은 다산신도시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차 없는 단지'가 늘면서 불협화음이 커지는 모양새다. 서울시에만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아파트 단지가 100여곳에 달한다.

택배 배송을 둘러싼 갈등의 대안으로 '실버 택배'가 주목받고 있다. 실버 택배는 택배회사가 일정 장소에 물건을 맡기면 단지 인근에 거주하는 어르신 택배기사가 단지 곳곳으로 배달하는 시스템이다. 정부·지자체·택배회사(CJ대한통운)와 길가온혜명 등 사회복지단체의 협력을 통해 2013년부터 전국 170여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12일 서울 구로구 천왕동 천왕이펜하우스 3단지 아파트의 '라이프센터'에서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는 어르신 택배기사들 /사진=남궁민 기자

지난 12일 3년째 실버 택배를 운영중인 서울 구로구 천왕동 천왕이펜하우스 3단지 아파트의 '라이프센터'를 찾았다. 이 곳은 '차 없는 단지'는 아니지만 아이들이 많은 단지 특성을 고려해 실버 택배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는 13명의 어르신 택배기사가 근무하고 있다. 4명은 해당 아파트 주민이고 나머지 9명도 인근 거주자다.

어르신 택배기사는 구청 보조금 15만원과 함께 건당 택배비를 택배회사로부터 지급 받는다. 오전 10시쯤부터 시작해 하루 2~3시간 가량 근무하고 월 20~30만원 가량의 임금을 받는다. 이를 합치면 월 평균 35~45만원 정도 버는 셈이다.


동네 곳곳에 물건을 전하는 어르신 택배기사들의 만족도는 높다. 최병운씨(78)는 "나이 들어서도 일할 수 있고, 매일 또래 친구들을 만나다보니 체력·정신적으로 활력이 생긴다"며 "소득이 생겨서 이젠 손주들 용돈도 주니 무척 즐겁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택배일이 힘들다고 하지만 가까운 거리의 정해진 단지를 다니면 되고, 매일 같은 곳을 가기 때문에 노인들이 하기에 아주 좋다"고 전했다.

라이프센터는 택배물 집하 뿐 아니라 어르신 택배기사들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었다. 택배차량을 기다리던 어르신 택배기사들은 바둑 등 게임을 하거나 일상을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12일 택배 하차 작업을 하고 있는 어르신 택배기사들 /사진=남궁민 기자

실버 택배의 장점은 주민과 택배기사 간의 끈끈한 신뢰다. 대부분의 어르신 택배기사는 사업 시작 때부터 3년째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센터 운영을 돕고 있는 50플러스어르신일자리지원단 조성희씨(51)는 "처음에는 어르신 택배기사에 대해 탐탁치 않아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3년 정도 시간이 지나고 어르신들과 주민들이 친숙해졌다"며 "이제는 서로 마주치면 먼저 인사하는 이웃 같은 사이가 됐다"고 말했다.

아파트 주민 A씨는 "워낙 흉흉한 얘기가 많다보니 예전에는 혼자 있을 때 택배를 받으면 무서울 때도 있었다"며 "이제는 매일 보는 할아버지가 배송해주다보니 마음이 놓인다. 아이들도 할아버지들을 보면 먼저 인사한다"고 말했다.

실버 택배 정착의 배경에는 협력적 모델 뿐 아니라 철저한 관리도 한 몫을 했다. 시력과 청력이 안 좋은 어르신 택배기사들의 업무를 돕고 고객들의 전화를 받는 할머니 직원 세 명도 근무하고 있다. 조씨는 "배달 후에는 꼭 전화와 문자를 남기고 전화 응대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최근 불거진 아파트 택배 갈등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그는 "서로 조금씩 양보하다보면 해결이 될 수 있을텐데 지금은 너무 틀어진 것 같다"며 "다른 곳들도 이곳처럼 단지 사람들끼리 협조해서 같이 해결책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