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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우리는 결국 바깥일 뿐

<145> 이명기 시인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

시인의 집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8.04.2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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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우리는 결국 바깥일 뿐

1995년 '오늘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명기(1966~ ) 시인이 첫 시집 '식물의 시간' 이후 18년 만에 두 번째 시집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을 냈다. 18년 동안 시인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시인의 말'에서 그는 "언젠가 몸이 떠돌던 곳을, 그 순간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떠도는 것은 상처"였지만 "그것은 중심이었다"고 했다. 그 상처는 "저 대륙과 대양의 경계"('그러므로 어둠은')를 넘는 순간 닥친 것이고, "빈 걸음으로 은행 문턱을 넘어서"('하루')야만 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남의 "말을 믿지 못하"('설마')는 불신, "식구가 늘"('정갈함에 대하여')어난 '백구네'를 부러워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망치에 잘못 맞아 굽은 못처럼 구부러진 것들이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다

꽝하고 닫힌 문짝을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 방바닥에 방생하고 간 마른 멸치를 꼭꼭 씹는다

언젠가 벌써 물거품처럼 사라졌어야 할 것들이
어떤 최후의 몸짓으로
좁쌀 같은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노려보고 있다

멸치는 단단하다, 멸치滅恥는 당당하다
하지만 사는 게 이렇게도 부끄러울 때가 있다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렇게 누군가 다시 돌아와 서로 뉘우칠 때까지
- '멸치' 전문


이 시에는 "날마다 문지방 넘듯/ 나를 넘어서는 길"('귀소歸巢')이나 "모든 게 잊혀졌다, 그것으로 충분"('세월교')하다는 깨달음 이전의 답답하고도 고통스러운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져 있"는 멸치는 "망치에 잘못 맞아 굽은 못" 같다. 멸치가 스스로 그물로 들어간 게 아닌 것처럼 못도 스스로 나무에 박힌 것이 아니다. 그나마도 제대로 나무에 박혔으면 구부러지지는 않았을 텐데 "잘못 맞아" 구부러졌다. 내 삶인데, 내 의지와 무관하게 굽은 길을 걷고 있다.

내 불행은 나 혼자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주변까지도 힘들게 한다. "꽝하고 닫힌 문짝"은 가족과의 불화를 의미한다. 같이 멸치의 똥을 빼다가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려 갈등은 심화한다. 방에 혼자 남은 내가 "꼭꼭 씹는" 건 멸치가 아니라 잘못 판단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멸치滅恥", 즉 사라지지 않는 부끄러움이다. 바다 건너 "먼 이국異國"('바나나 옷걸이')의 일과 가족과의 불화는 "벌써 물거품처럼 사라졌어야 할" 운명, "최후의 몸짓"을 연상할 만큼 고통스럽다.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노려보"다가 화를 삭이며 마저 멸치를 다듬는다. 멸치를 "방바닥에 방생"한 누군가는 아내라 할 수 있지만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다시 돌아와 서로 뉘우칠 때까지"의 누군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 나와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멸치는 아주 작지만 시내나 강이 아닌 대양을 헤엄치던 바닷물고기다. 뼈대 있는 가문, 큰물에서 놀아봤다는 자부심이 숨어있다. 이는 표제시 '오래된 처마 아래서'의 "오래된 집"의 "저 막사발 같은 발자국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지금은 비롯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삶일지언정 작은 "빗방울이 파놓은/ 단단한 파문들"과 "단단한 울림들"처럼 언젠가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다는 염원을 담고 있다.

사과 한 개의, 그때의 사과는 통념이다

하지만 서서히 붉어지는 얼굴은
분명 그 안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관념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중에 매달린 것들
처음부터 바닥을 향해 있는 것들
찾아가다 보면 어차피 정처 없는 것들

하지만 세계는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바깥을 열고 안으로 들어설수록
그 빈틈없이 들어찬 캄캄한 눈부심

아직 바람조차 태어나지 않은 그 태초의 순간에
과도한 생각의 끝이 가닿자
무언가 꿈틀 몸을 피한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욕망이라 말하기도 한다

안이란, 바깥을 깎아내면
그만큼 더 들어가는 바깥일 뿐,

우리는 결국 그 바깥일 뿐인
그 안의 무언가를, 내면이라 이르기도 한다
- '사과 한 개의 말' 전문


이명기의 시에는 길과 말이 수시로 등장한다.

"그 좁은 길을 대륙을 횡단하듯 가로질러 건너갔다"('바쁠 것 없이 걷다가'), "멀리 가는 길이 먼 길이 아니라/ 걸어서 갈 수 없는 길이 먼 길이다"('귀소歸巢'), "처음부터 길이 아니라 나갈 수가 없다"('이중창문 사이에서'), "잠시 그림자가 사라졌던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는가"('함허동천') 등에서 알 수 있듯, 잘못 들어선 길에 대한 자책과 반성이 들어있다. "들을 말이 없어서 좋겠다/ 시시비비 없어서 정말 좋겠다"('작은 새'), "이제 제 말을 믿을 수 있으시겠어요?"('설마'), "아무래도 말이 아닌 게 낫겠다"('말하는 새'), "몇 마디 어눌한 말이 침처럼 흘러나왔다"('신경치료') 등에서는 사람의 말에 속은 것에 대한 하소연과 안타까움, 원망이 서려 있다.

시 '사과 한 개의 말'은 사과(沙果)에서 사과(謝過)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내밀한 성찰이 돋보인다. 사과 한 개는 일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인 통념(通念)이지만 붉은 사과에서 연상되는 붉은 얼굴은 "그 안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 즉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한 견해나 생각인 관념(觀念)이다. 사과는 나뭇가지에 맺히는 순간부터 "바닥을 향해 있"고, 사과를 받으러 찾아가는 일 또한 "정처 없는" 욕망으로 비유된다. 과도(過度)이면서 과도(果刀)이기도 한 "과도한 생각의 끝에 가닿자" 다 부질없는 없는 일임을 깨닫는다. "바깥을 깎아내면/ 그만큼 더 들어가는 바깥일 뿐"이다. 안이라 생각하는 순간 다시 바깥인 것. 나의 내면도, 타인의 내면도 들여다볼 수 없다. "푸른 발자국처럼 젖는 그런 계절"('어느 후박나무를 바라보는 오후')에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의 삶은 "늘 난전"('은유')이다.

아픈 몸이 병病을 밀고 가듯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은
잎이 필 때, 잎이 지고 날이 저물 때
우리의 오랜 저녁을 밀고 간다
-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 부분


◇ 허공을 밀고 가는 것들=이명기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12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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