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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춘자 씨의 느닷없는 질문

<146> 박성현 시인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입력 : 2018.05.05 07:29|조회 :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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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춘자 씨의 느닷없는 질문
2009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박성현(1970~ ) 시인의 첫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은 "아주 익숙한 곳에서 느끼는 섬뜩한 감정의 이물"('시인의 말')이라는 문장을 통해서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아주 익숙한 곳"은 과거의 경험(추억)과 내가 현재 사는 공간이면서 불안한 미래를 상징한다. "섬뜩한 감정"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에 대한 반응의 총체라 할 수 있는데, "이물"이라 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감정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일탈한 자아 혹은 어둠이라 할 수 있다.

저녁이 맹렬하게 쏟아졌다 코를 중심으로 뚜렷한 굴곡을 갖춘 얼굴들이 식탁에 앉았다 음식을 씹거나 TV를 본다 이런 어둠은 처음이지? 모든 얼굴들이 춘자를 쳐다보다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먼지가 겹겹이 쌓인 물병자리가 커튼에 가려진다

- '회색의 식탁' 전문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식탁은 "아주 익숙한 곳"이다. 급히 차린 식탁에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이 모여 앉아 식사한다. 식사하면서 TV를 보는 것은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풍경이다. 그때 "이런 어둠은 처음이지?"라고 '춘자'가 묻는다.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다. '어둠'은 죽음이나 이에 상응하는 상황을 나타내고, '처음'은 이런 것이 오늘만 있는 일이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이라는 역설이다. "모든 얼굴들이"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이런 어둠은 처음이지?"라고 묻는 사람의 권위가 아닌 상황의 타당성이다. 그 식탁에 있는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상황이면서 "커튼에 가려진" 무대 공간이기도 하다.

우연이지만, 춘자는
춘자의 마리오네트를 조종하는 기분이 든다

춘자는 이 끝없이 반복되는 인형극을
춘자의 의견이라 이름 붙인다
-'춘자의 의견' 부분


배우들이 춘자를 연기하기 전,
모자를 쓴 토끼가 무대 중앙으로 뛰어간다

─ 거긴 지금 몇 시니?

무대에서 춘자들은:

메마른 분수대에 앉아 미지근한 맥주 캔을 마시거나 격렬하게 날아가는 비둘기를 쫓는다. 일회용품처럼 반짝이는 햇볕에는 아직 피지 않은 춘자가 있다. 먼지가 쌓인 책처럼
-'춘자들' 부분


이 시집 곳곳에 '춘자'가 등장한다. 춘자는 과거에서 가져온 대중적이면서 친근한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섬뜩한 감정의 이물"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미 폐기처분한 춘자의 이미지를 현재로 다시 호출한 것은 춘자가 '과거의 나'이면서 '현재의 나'와 가족,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춘자는 무대에서 연기할 뿐,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주객이 구분되지 않는 혼돈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 춘자를 통해 살아 있음의 죄의식과 덧없음, 죽음을 향해 폭주하고 있는 인간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고 있다.

이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 질문법이다. "거긴 지금 몇 시니?"라고 묻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지만 "지구의 종말은 얼마나 남았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특히 질문 14개로 이루어진 시 '14'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 질문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부터 마지막 질문 "저 수많은 입들은 얼굴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까지 살아가면서 겪는 난개발이나 가난, 환경문제 등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무책임, 허위의식 등을 비판하고 있다.

망가진 시계처럼 그는 복도에 서 있다가 화장실로 간다. 느리게 소변을 보고, 더 느리게 걸으며 더욱 더 느리게 목록을 정리한다. 창고에서, 그는 잠시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과를 생각하는데, (사과는 지구의 공백이다) 그것이 썩어가는 방향에는 웃음이 있다.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부분


시인이 다른 시집 서평에서 "사물과 그것에 밀착된 배후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격절(激切)의 순간, 시는 그 '사물'을 다시 쓴다"라고 한 말을 되새겨볼 때, 사과는 지구를 상징한다. "사과를 움켜쥔 손가락은 사과가 회전하는 방식"('사과의 회전'), "벌레 먹은 빨간 사과"('현기증'), "사과가 썩어가는 방향"('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매일 사과를 놓치고 있다"('없는 손')는 다 멸망해가는 지구를 비유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야 하는 회전목마나 지구가 "썩어가는 방향에는 웃음이 있다"는 것은 역설이다.

한 편의 모노드라마 같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손, 내가 바라보는 사물들, 나와 같이 사는 사람들, 내가 살고 있는 지구, 심지어 "모든 난처한 질문들"('5분 후')까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우리는 구경하는 사람들일 뿐"('사진관 옆 왼쪽 모퉁이'), "어느 날 죽음이 찾아 왔을 때"(이하 '비타민 사용 설명서') 우리는 "누군가 내 사용 설명서를 갖고 있었군" 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박성현 지음. 문예중앙 펴냄. 192쪽/9000원.


[시인의 집] 춘자 씨의 느닷없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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