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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雜s]프라하 연인들의 마라톤, '나의 조국' 전율 속에 달리다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 |입력 : 2018.05.13 04:43|조회 : 1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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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50대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소소한 다이어리입니다.
지난 6일 오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 프라하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출발점이자 중간기착점, 골인점인 구시가 광장을 지나고 있다. 뒷편은 성 니콜라스 성당.(출발후 약 13킬로미터 경과 지점)/사진=Marathon-Photos.com
지난 6일 오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 프라하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이 출발점이자 중간기착점, 골인점인 구시가 광장을 지나고 있다. 뒷편은 성 니콜라스 성당.(출발후 약 13킬로미터 경과 지점)/사진=Marathon-Photos.com
프라하 마라톤에서 '1등'을 했다.
보스턴 뉴욕 런던 도쿄 마라톤만큼은 유명하진 않지만, 지난해 세상을 떠난 고(故)김주혁이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들'에서 전도연과 달렸던 대회라면 느낌이 다를 것이다.

'동유럽의 진주' 프라하에서 지난 6일 열린 2018년 대회.
최고의 화제는 '백인'인 미국의 갤런 럽(Galen Rupp)이 케냐 등 아프리카 선수들을 제치고 2시간6분7초의 개인 최고기록으로 우승한 것이다.

(아무도 몰랐던, 이제부터 몇 명은 알게 되는)두 번째 화제는 50 넘은 대한민국 중년 하나가 제 돈 내고 마라톤 하겠다고 날아와 한국 출전자중 1위를 한 것이다. 4시간29분의 개인 최저기록으로.

휴가를 달려갔다왔다.
남북미중간 물밑 물밖 대화, 포털 아웃링크, 문대통령 취임1주년 이슈들...무엇보다 어버이날까지 끼었는데.

발령후 불과 넉달만에 낸 휴가다.
바로 전날 편집국 워크숍에서 "행복한 노동자가 만든 제품이 소비자를 만족시킨다. 기자가 행복해야 기사도 감동을 준다. 데스크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라고 이야기 하고 다음날 곧바로 튀었다.(국장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속으로만 했지만, 기자님들은 눈치가 빠르니 '저 자가 휴가라도 가려나' 하고 생각들은 했을 것이다)

얼마전 '개인의 삶을 희생해야 하는 생활은 못하겠다'며 기자를 그만 둔 후배가 있었다.
데스크건 기자건 휴일근무는 수당으로 받지 말고 대체휴일을 쓰고, 휴가는 반드시 다 쓰도록 연초부터 시행해온 터였다. 그런데도 이미 심신이 지친 탓인지 맘을 돌리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물론 꼭 이런 이유만은 아니고, 그 친구는 인간의 세가지 성(性)인 '남자 여자 기자' 중에 젤 하등인 기자 하기엔 너무 물러 보이긴 했다)

나이 50 넘어가면 조만간 쉬기 싫어도 쉬어야 하는 날이 온다. 앞으로 창창하게 쓸 수 있는 휴가보다 '일'이 소중하다. 책임이 늘어나면 휴가가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일터는 지킬 테니 후배들은 쉬라'는 상사의 배려심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그런 책임감이 중국집에서 "비싼 거 맘껏 시켜, 난 짜장면"이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 나 휴가 가는 건 후배들에게 "난 탕수육, 니들도 먹고 싶은거 시켜"라고 말하는 거다. 후배들도 짜장면 시키는 선배 앞이라도 당당하게 "전 제가 계산할테니 팔보채 주세요" 하라는 말이다. 먹을 때 열심히 먹고 힘 많이 써야 하니까.

마라톤 이야기하려는데 서론이 이렇게 길게 주절주절 길어지는 거 보니 워라밸은 무슨, 나 역시 눈치 보고 사는, 그러면서 남한테 눈치 주는 찌질한 꼰대임이 분명하다.

#####

아무튼 1주일 전인 6일 아침 9시, 이 모든 '잡념'을 깔아뭉개고 나는 프라하 올드타운 스퀘어(구시가 광장)에 서 있었다. 지축까지 쿵쿵 울리는 스메나타의 교향곡 '나의 조국, 2악장-몰다우강(체코어로는 블타바)'을 들으며 스타트를 끊었다. 15년여 동안 수없이 마라톤 대회를 나가봤지만 교향곡 들으면서 출발하기는 처음이다.
보헤미아(체코 서부지역)의 민족음악가 스메타나는 음악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 항거한 혁명음악가였다. '나의 조국'은 그가 죽기 1년 전인 1883년 프라하에 헌정한 곡이다.

구시가 광장 중앙에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의 기득권과 부패에 반발해 종교개혁에 나섰다가1414년 화형당한 체코의 정신적 지주, 얀 후스 동상이 서 있다. 후스 동상 주변을 프라하의 랜드마크인 틴 성당, 천문시계탑 등 바로크 로코코 고딕 양식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어 '나의 조국' 메아리의 울림이 더욱 장엄하다.

구시가광장 근처엔 1918년 독립선언,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혁명이 일어난 바츨라프광장이 자리 잡고 있다. 체코의 구시가지는 혁명과 저항의 역사를 간직한 무대 그 자체인 셈이다. 이후 대회부터는 이 무대에서 실제 오케스트라가 '나의 조국'을 연주한다면 말 그대로 환상이겠다.
보헤미아의 저항과 혁명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천년고도의 위엄은 '남의 조국' 교향곡을 듣는 이방인의 가슴 속까지 전율을 전달해준다.

왕릉들과 첨성대 궁궐터 사이를 달렸던 '천년고도 코스' 경주마라톤의 감동도 이에 못지 않았다. 근데 출발점이 현대식 스타디움인데다, 경주엔 스메타나의 교향곡이 없었다. 유적지 근처에서 스타트 하는건 어렵다고 해도, 신라 우륵의 가야금 곡이라도 복원해서 틀어주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뚱기덩 뚱당..띵띵 똥똥~ 출발해뿌라 마!!!" 하면 주자들이 어깨춤을 들썩이면서 몰려나간다...흠,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어떤가, 상체 근육도 풀고 좋겠구만(경주마라톤 주최하는 동아일보 양반들 좀 읽어야 하는데).

2018 프라하마라톤 출발점인 구시가광장. 왼쪽이 종교개혁가 얀 후스 동상, 오른쪽 건물은 국립미술관, 첨탑은 틴 성당의 일부.
2018 프라하마라톤 출발점인 구시가광장. 왼쪽이 종교개혁가 얀 후스 동상, 오른쪽 건물은 국립미술관, 첨탑은 틴 성당의 일부.
아무리 '광장'이래도, 9778명의 참가자를 수용하긴 힘든 터라 구시가광장 옆 골목까지 출발선이 길게 늘어섰다. 참가자들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울타리가 쳐지고, 일찌감치 교통도 통제됐다. 큰 맘 먹고 휴일 아침 일찍 프라하 관광 나선 사람들이 시내에 가득한데 큰 도로 작은 골목 할 거 없이 막아놨으니 나로선 '마라톤 길티(guilty, 유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다들 박수 쳐주고 즐거워 한다. 이것도 신기한 구경거리로들 여기는 듯했다. 서울 시내를 달리면서 겪게 되는 야유와 전투(마라토너들이 길을 전세낸 데 대한 분노를 참다 못해 승용차로 통제선을 밀치고 돌진하는 사람까지 봤다)가 이곳엔 없었다. 관광도시인데다, 풀코스대회가 (내가 알기론)1년에 한번 밖에 열리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뉴욕마라톤도 그 점은 비슷했다.

프라하마라톤의 특징이자 장애물 중 하나는 돌길이다. 구시가 대부분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도시답게 출발점인 올드타운스퀘어를 비롯, 유적지 곳곳의 도로가 수백년 된 큼지막한 돌로 포장돼 있다. 보기는 아름답지만, 얇은 레이싱화로 밟고 뛰기에는 쥐약이다.

출발할 때는 그렇다 쳐도 완전 녹초가 된 골인지점의 돌바닥은 자동차 통행 방지를 위해 박아둔 쇠꼬챙이처럼 느껴진다. 어지간한 주말마라토너는 프라하 마라톤 갈 때 레이싱화 대신 '쿠션화'나 '안정화'를 선택하는게 낫겠다. 하기야 적잖은 돈 들여 남의 나라에 와서 42.195킬로를 뛰는 미친 짓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정도 발바닥 고문은 흥분을 고조시키기 위한 마조히즘 도구일지도 모른다.

블타바 강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의 모습(왼쪽)과 체코 국립음악당 전경.
블타바 강에서 바라본 프라하 성의 모습(왼쪽)과 체코 국립음악당 전경.
프라하 마라톤 코스는 구시가 광장을 출발, 체후프 카를루프 등 다리를 10번이나 건너며 블타바 강변을 오르내리고, 시가지 외곽을 돌아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온다. 외곽 신시가지 쪽 풍경은 여느 서구 도시 신시가지와 차이가 없다.하지만 프라하 성, 국립음악당, 카를 브릿지, 댄싱 빌딩 같은 인스타그램에서나 볼 수 있던 곳들을 지나도록 코스가 설계돼 달리는 내내 프라하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

비 올 땐 우중주(走),
밤새 뛰는 철야주,
똥 줄 빠져라 전력주,
남하고 발 맞춰 동반주,
출근 전에 가볍게 출근주,
보람 찼건 아니건 퇴근주,
술김에, 술 마시며 취중주,
덜 깬 채로, 술 깨려 해장주,
하염없이 길게 달리는 거리주,
대회 뒤끝 몸풀기 설렁설렁 회복주,
참가비 안 내고 배번 없이 슬쩍 뛰는 뻐꾹주,
딴 사람 칩 달고 ‘서브3’나 보스턴 참가기록 내 주는 대리주,

달리기 종류도 가지가지지만 재미로 치면 백미는 역시 멀리 떠나는 관광주 여행주다. 돈이 들어서 그렇지ㅠ

프라하 관광주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중세에 건립된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카를루프 다리(찰스브릿지, 카를루프모스트)이다. 10년도 넘은 드라마지만 재희(전도연)가 다리 위에서 앞서 걸어가고 상현(김주혁)이 뒤따르는 '프라하의 연인' 장면이, 특히 김주혁이 운명한 뒤로 더 눈에 밟힌다는 팬들이 아직도 많다.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솔로 연인 가족 신혼부부들로 가득 들어찬 이곳을 거침없이 달려서 건너는 호사는 참가비에 대한 유감을 조금은 덜어준다(참가비가 신청시기와 종류와 시기에 따라 우리나라 의 2~3배 되는데다, 옵션인 티셔츠에 사진까지 총 162유로를 비용으로 치러야 했다).

프라하를 찾는 연인들은 예외 없이 이 다리에 오면 성 요한 네포무크 상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빈다. 외간남자와 사랑에 빠진 왕비의 고해성사 비밀을 지켜준 죄로 왕에게 처형당한 성인이란다. 연인 아니라 남녀노소가 다들 문질러 대서 아래쪽이 반질반질 빛난다.

그런데 나만 그런가, 나이 오십이 넘으니 이런 곳에 가서 빌 '소원'도 없어지는게.부족한게 없어서? 설마 그럴 리가.
사랑 행복 어쩌고 하자니 사지가 먼저 오글거리고, 물질을 갈구하자니 찌질하고, 건강이야 제 스스로 챙기는 거고, 국가와 민족은 나 말고도 걱정하는 국민들이 너무 많으니 패스…소원 좀 생기게 해달라고나 빌어야 하나. 앞서 왔던 '너'들은 대체 뭘 빌었던 게냐.

지난 6일 체코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프라하마라톤 참가자들이 카를루프 다리를 건너고 있다. 멀리 오른쪽 위에 보이는 건물이 프라하 성. /사진=Marathon-Photos.com
지난 6일 체코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프라하마라톤 참가자들이 카를루프 다리를 건너고 있다. 멀리 오른쪽 위에 보이는 건물이 프라하 성. /사진=Marathon-Photos.com
학자-기자-사업가를 거쳐 체코에서 인생 4막을 열어 보겠다며 홀홀단신 지난해 프라하를 선택한 이 모 선배가 농담처럼 프라하 마라톤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래도 실제로 카를 다리를 이렇게 달리게 될지는 몰랐다. 이 모 선배는 '전지현 오일, 맥주샴푸'로 잘 알려진 체코 특산 브랜드 BOTA****S의 올드 스퀘어 매장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마케팅을 한다(이거 PPL 맞다. 경고 먹더라도 좀 알려야겠다).
그 선배와의 대화 결론은 "'다음'이라는 말은 '다음 생애에서나' 하는 말이나 같다" 였다. 나이 오십 넘으면, 이제부터 하는 시도는 대개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하는 일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 '못먹어도 GO, 난닝구는 TRY'. 덜컥 신청을 했다.
선배 얼굴도 보고, 주말 끼면 하루이틀 휴가 내면 되겠다 싶었다. 비행기 표는 소멸기간 다가오는 항공사 마일리지를 털고, 숙박은 '빈대'로, 컨디션조절을 위해 밥 술은 최소화. 그럼 뭐 얼마 안 들겠네 하는 계산이 나왔다(물론 내 계산은 나중에 보면 대부분 틀린 걸로 판명난다).

체코어로 된 사이트들 뒤져 런체크(Run Cezch, https://www.runczech.com/) 회원가입하고, 카드로 계산까지 했다. 졸지에 체코마라톤 회원이 됐다.
회원되고 결제하는거 간단했다. 공인인증서 없어도, 생년월일 안 넣어도, 기괴하게 생긴 인증기호 안쳐도, 초등학교 선생님 이름이 뭔지 기억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영어대소문자에 숫자에 특수기호까지 넣은 비밀번호 안 넣어도 된다. ICT(정보통신기술) 보안에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도 뻑하면 '우간다보다 못한' 금융사고가 터지는 한국의 면피용 과잉보안 시스템에 대해 이럴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일단 비행기 표부터 끊고, 조심스럽게 식구들에게 프라하 마라톤 이야기를 꺼내면서 "같이들 가든지 뭐"라고 슬쩍 내던졌다. 물론 절대 못 갈 거란 계산이었다. 둘째 녀석은 하루가 천금같은 고2이고, 첫째 녀석은 친구들하고 싸돌아다니는걸 좋아하는데다, 여름에 교환학생 나간다고 했으니 귀찮아서 안 나설 것이고. 다들 체코나 프라하에 대해 평소에 1도 관심이 없었으니.
'너나 가라 하와이, 아니 프라하' 라는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너만 가나 프라하'였다. 줄줄이 따라 나섰다.

비행기 표가 없대도, '꼭 같이 갈 필요 있냐'며 4시간 더 걸리는 경유노선을 마다하지 않았다. 숙소는 '빈대' 대신 에어비앤비 독채를 빌려야 했다. 결국 나와 나머지 세 명은, 갈 때도 따로 가고 올 때도 나만 먼저 귀국하는 기이한 가족여행을 감행하게 됐다. '마일리지와 빈대'로 해결하고자 했던 '알뜰마라톤' 계산은 물거품이 됐다.

비행기와 숙박에서 아낀 비용을 대회전 열리는 마라톤 엑스포에 아낌없이 할당하려던 계획도 날아갔다. 대규모 국제대회는 대개 하루 전날 온갖 전문 브랜드들이 참가하는 '엑스포' 장터를 연다. 신제품들이 대거 등장하고 가격 할인폭도 크다.

모름지기 '인생은 운7기3, 운동은 장7기3(장비가 70%, 기량이 30%)'이라고, 신발이나 용품 '신병기'를 하나 장만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빠 돈을 자기네 돈으로 생각하는 애들에게 고삐 잡힌 소처럼 끌려나오면서 대회 때 먹을 파워젤 네 개 겨우 사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날아간 건 비용만이 아니었다. 비록 대회 전날 혼자 푹 쉬면서 컨디션 조절하고 가뿐하게 펀런(Fun Run)해야겠다는 계획도 틀어졌다.
대회 이틀전 늦게 도착, 전날 프라하 시내를 하루종일 발이 퉁퉁 붓도록 도보관광을 했다(걷는게 달리는것보다 힘들다). 저녁땐 체코 특산 필스너 우르겔(체코 필젠 지방의 오리지널이라는 뜻)맥주에, 와인까지 반병 넘게 마시며 그 힘들다는 숙취주 모드로 돌입했다.

혹, 이 글을 읽고 프라하마라톤 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예 가족들도 풀코스 대회 하루 전에 후원사인 폭스바겐이 개최하는 10킬로미터 달리기, 애완견 달리기에 등록시켜서 '이해 관계'를 일치시키는게 현명할 듯 하다.

5월의 투명한 프라하 하늘, 미세먼지 하나 없는 공기 속에 전날의 피로를 풀며 달렸다. 프라하 성 근처를 지날 때 한 젊은 여성 참가자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지금은 나 혼자 남은 회사 마라톤 클럽 'I RUN' 유니폼 등판에 '머니투데이'라고 한글로 씌어 있어서 반가웠나보다. 현지 유학생이나 교민인 듯했다.

한국사람을 본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끝난 뒤 공식 집계를 보니 한국 국적 참가자는 나 포함 3명(북한 0)이었다. 당연히(?) 내가 한국 1위였다.
중국은 297명, 대만 14명, 일본은 109명. 한국 마라톤의 장래가 암담해 보인다.

비행거리 10시간의 체코는 의외로 우리와 가깝다. 대한항공이 2013년 체코항공 지분 44%를 인수(작년에 재매각), 직항노선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공항에 체코어 영어와 함께 한국어 안내가 씌어 있을 정도다. 이민을 거의 받지 않는 탓에 장기 체류 교민은 2000명 수준이지만 한해 관광객은 30만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프라하에서 마라톤 풀코스 뛰겠다는 사람이 30만명 중에 한두명 뿐이라니.

마라톤 전문여행사를 표방한 '여행춘추'(지금은 오픈케어 스포츠투어로 바뀐 듯 하다)의 정동창 대표가 10여년 전 프라하마라톤 답사왔다가 쓴 글이 있던데, 수요가 적어서 패키지 상품까지는 만들지 못한 모양이다.
'프라하의 연인들'이 방영됐던 2005년 즈음엔 주인공들이 입고 신었던 옷과 액세서리는 물론 마라톤화까지 한국에서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이라도 '프라하 연인마라톤' 상품 내놓고, '배틀 트립' 출연자들 한 번 뛰게 만들면 여행 의류 신발 업체들 난리 나지 않을까.

지난 6일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 프라하마라톤 골인점인 구시가 광장에서 응원 관중들이 완주한 참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6일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열린 2018 프라하마라톤 골인점인 구시가 광장에서 응원 관중들이 완주한 참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남들 장사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 상태나 잘 챙기자.
동포에게 "반갑습니다. 힘내세요"하고는 힘차게 앞으로 치고 나가며 짐짓 허세를 부렸다. 연도에 늘어선 응원단의 함성과 고색창연한 건물들의 위용에 취해 속도가 빨라진 탓에 하프를 넘어설 때까진 실제로 제법 폼도 났다.

1만명 참가자 중 절반 가까이가 독일 유럽 프랑스 등 체코 이외 지역에서 온 외국인들인데 기왕이면 국위선양을 위해 태극마크라도 달고 올 걸 그랬나. 문재인-김정은 회담에 이어 트럼프-김정은 회담도 앞두고 있는 마당에, 한반도 평화에 관심 가져달라고 한반도기를 붙였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때가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거의 마지막 지점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특히 불길한 예감은.
30킬로미터가 넘어가면 준비되지 않은 런너에게는 런너스 하이(High)가 아니라 런너스 헬(Hell)이 찾아온다. 킬로미터당 페이스가 5분30초 대에서 6분대 후반, 7분대로 떨어지더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태극기 한반도기 안 달고 오길 잘했다. 'Let’s run, We are almost there'라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간바레(がんばれ)' '짜이요(加油)' 인사라도 하며 국적을 숨겨야 할 몰골이 됐다.

그렇게 고난의 길 10킬로를 겨우겨우 버틴 뒤, 블타바강을 오른편에 두고 올드타운 광장으로 좌회전 해 마른 수건 쥐어짜듯 남은 에너지를 박박 긁어 골인했다. 처음 완주한 듯 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사람도 보이고, 금속 목발을 짚고도 나보다 한참 앞서 골인한 진정한 '철인'도 자리에 앉아 쉬고 있었다.

4시간29분07초. 다섯 달 전 세운 내 최고기록(3시간25분)보다 1시간4분이 느려졌다. 초보시절이나 특수지역 대회를 빼곤, 개인 최저기록이다.
그래도 뭐 '오프라 라인'은 지켰네. '요요'의 아이콘 오프라 윈프리가 치열한 연습 끝에 1994년 해병대 풀코스 마라톤대회를 완주한 기록 4시간29분이 오프라 라인이다. '비만 오프라'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며 마라톤에 도전한 사람들이 내심 목표로 설정하는 속도가 4시간29분이다. 쉬워 보이지만 1킬로미터를 6분25초, 시속 9.5킬로 이상으로 한번도 안 쉬고 달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프라에 대한 존경심만 간직한 채 포기하게 되는 '오프라 월(Wall)'이기도 하다.

골인 직후 문자로 날아온 공식 기록은 골인점 계측시계와 똑같은 4시간32분이다. 출발점과 골인점의 라인을 실제 밟은 시간을 재는 칩(chip) 타임이 아니고 그냥 건타임으로 통보한 것 같다. 덕분에 나는 공식적으로 언론계 라이벌 오프라에게 지고 말았다. 무려 24년 전에 그가 세운 '벽'을 못 넘었다.

하지만 전혀 아쉬움이 없다. 프라하 시내를 울려 퍼지는 스메타나 교향곡을 감상했고, 주로의 울퉁불퉁한 바닥돌이 제공하는 지압효과를 누렸으며, 프라하성, 카를다리, 블타바 강, 합스부르크 왕조의 스케일과 보헤미아의 기풍을 눈과 마음에 담았으면 그만이다. 두 시간을 뛴 우승자 갤런 럽보다 4시간 반을 뛴 내가 더 오래 즐긴 건 분명하다.

돌아와 보니 세상은, 그리고 회사는 이전과 똑같이 잘 굴러가고 있었다. 복귀한 날 하루, '패스트 트랙(Fast Track)'으로 그간의 일들을 업데이트 하느라 평소보다 좀 더 바빴을 뿐이다.
나 없어서 회사 삐걱거리면 존재감 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나 없어도 조직은 굴러간다, 나 없으면 더 잘 굴러가야 한다.
노는 게 소중해야, 일도 귀중하게 대한다.

2018 프라하마라톤 코스도.
2018 프라하마라톤 코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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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 우승자 갤런 럽은 아이오와 출신의 오리지널 미국인으로 작년 시카고 마라톤에서도 케냐의 아펠 키루이, 버나드 키폐고와 끝까지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2분9초20의 기록으로 28초 차이로 우승했다.

4월16일 보스턴 마라톤에서 눈보라 역풍 영하에 가까운 날씨 속에 고전하다 30킬로지점에서 기권한 지 한 달도 채 안돼 다시 풀코스에 도전해 이룬 기록이다. 우리 같은 거북이 주말런너들이야 한달에 두 세번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도 별 문제 없지만, 2시간10분 이내 기록의 프로 러너가 3주만에 풀코스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는건 경이적인 일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1만미터 은메달리스트였던 그는 마라톤으로 전향,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데 이어 시카고올림픽, 프라하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말과 자동차에 익숙한 앵글로 색슨 혈통 럽이 수천년간 맨발 장거리 사냥의 DNA가 각인된 마라톤 명품 종족 칼렌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 한계를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한 '이봉주' '황영조'를 언제 다시 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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