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날]후보에 전화해 '공약' 물으니…"공보물 보세요"

6·13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은평구 대조동 한 건물 외벽에 각 후보들의 벽보가 부착돼 있다./사진=머니투데이DB

#생애 첫 투표를 앞둔 대학생 A(19)씨는 요즘 몹시 혼란스럽다. 시장, 도지사부터 기초의원까지 뽑아야 할 사람도 많고 후보도 많아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판단이 안 돼서다. 선택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집으로 배송된 선거 공보물을 살펴봤지만 자세한 공약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후보들의 공약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보고 투표해야 할지 몰라 A씨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6·13 지방선거에 '공약'이 사라졌다.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불기 시작한 평화 훈풍이 지역 이슈를 집어삼키고 후보들의 공약 발표가 전반적으로 늦어지면서 이번 선거가 공약이 실종된 ‘깜깜이 선거’로 전락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선출되는 인원은 무려 4016명. 지방선거 사상 최대 규모인 동시에 지역 살림을 맡을 일꾼을 뽑는 중요한 선거다. 후보마다 지역 현안을 풀어나갈 해법을 제시한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정책 선거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후보의 공약을 검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후보 간 정책 대결이 사라져 유권자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 “궁금하면 후보에게 전화하라고요?”…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공약

공약은 유권자의 판단과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후보들이 공약 제시 및 홍보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해 판단을 흐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전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7일 기준 17개 시도지사 후보 71명 중 '선거공약서'를 작성한 후보는 21명으로, 30%에 불과했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66조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후보는 선거공약 및 추진계획을 담은 선거공약서 작성을 권고하고 있다. 선거운동 기간 공보물 외에 별도로 배포할 수 있어 정확한 공약과 소요 재원을 알리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후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후보들의 자세한 공약 사항에 대한 정보를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고 있다. 지자체장 후보의 경우 5대 공약, 선거공약서 등을 확인할 수 있지만 기초 의원의 경우 공보물 외에는 공약 세부사항을 살펴볼 수 없었다. /사진=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캡쳐

선거공약서 권고 대상이 아닌 기초자치단체 의원의 경우 정책경쟁에 대한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해 유권자의 알 권리를 제약한다는 비판이 더욱 거세다. 실제로 선거 공보물은 물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서도 기초의원의 공약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초의원 공약의 세부 사항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서대문구 나 선거구 구의원 후보들의 선거사무소에 연락을 취해봤다.

김덕현 더불어민주당 구의원 후보 선거사무소 관계자는 "공약 관련 사항은 이곳에서 답변이 불가능하니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공보물에 있는 후보의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라"고 말했다. 김 후보와도 직접 통화했으나 "관련 자료가 없다. 공보물에 있는 공약만 보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공약에 대해 묻다 '진짜 유권자가 맞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최원석 자유한국당 구의원 후보 선거사무소 관계자는 "공약에 대해 묻기 전에 유권자 본인의 신상을 밝히는 게 예의 아니냐"며 주소와 이름을 확인했다. 이후 최 후보 사무소도 역시 공약 관련 자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다 보니 유권자가 나서도 후보의 공약을 확인하고 검증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대학생 김지영(23)씨는 "공보물을 보니 공약이 딱 4줄 뿐인 후보도 있었다"며 “후보들이 나서서 공약을 홍보해도 모자란 상황인데 공약 혹은 관련 정보가 부실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비방 vs 비방’…정책 선거 대신 네거티브로

후보 간 네거티브 공방이 거세지면서 공약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후보들이 공약 대신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며 지방선거가 비방전으로 얼룩지는 모양새다.

경기도는 주요 후보 간 네거티브 공방전이 가장 치열한 곳이라 평가받고 있다. 지난 5일 열린 경기도지사 두 번째 TV토론회에서는 기조연설부터 네거티브 설전이 벌어졌다. 김영환 바른미래당 후보는 이날 기조연설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여배우 스캔들’과 관련된 의혹을 다시 한번 제기했다. 이에 이재명 후보는 “앞서가는 후보를 헐뜯는 네거티브로 일관하고 있다. 허위사실 유포에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당 차원에서도 네거티브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이유로 당 홈페이지에 ‘지방선거 후보자 검증 시리즈’를 게재 중이다. 한국당은 이재명 후보의 욕설 음성파일을 올린 데 이어 김경수 경남지사 후보의 드루킹 연루 의혹, 은수미 성남시장 후보 조폭 연루설 등의 의혹을 담은 게시물을 내보냈다.

상대 후보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이번 지방선거에 대해 한 유권자는 “비방전이 계속되다 보니 자극적인 이슈에 밀려 후보의 공약은 보이지도 않는 상태”라며 “후보들이 네거티브가 아닌 정책으로 지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 “공약은 일종의 고용계약서. 유권자가 ‘갑질’해야"

/사진=이미지투데이

지방선거는 지역 살림과 교육을 담당할 일꾼을 뽑는다는 점에서 지역 주민의 실생활과 매우 밀접하다. 그 때문에 공약에 대한 무관심과 후보들의 정책 경쟁 의지 약화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돌아간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내 삶과 가장 가까운 공약이 나오는 곳이 지방선거”라며 “유권자들이 더 관심을 가져 지역의 과제들을 의제화하고 후보들이 내놓은 해법을 비교·분석해 투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전했다.

후보의 공약은 일종의 고용계약서다. 선거를 통해 국민이 정치인을 고용하고 이 과정에서 유권자는 정당이나 후보의 정책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 이 총장은 “뽑고 난 뒤 ‘속았다’ ‘실수했다’고 하기 전에 고용계약서인 공약을 따져봐야 한다”며 “후보에게 적절한 공약 수립과 이행을 요구하는 등 유권자가 지방선거에서 ‘갑질’을 해야 지역이 발전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