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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미국 대통령에게 큰절한 조선 사절단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5 – 보빙사 : 미국과 수교하고 견문을 넓히다

사극속 역사인물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입력 : 2018.06.16 06:58|조회 : 8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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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미국 대통령에게 큰절한 조선 사절단


1883년 9월 18일 뉴욕 5번가 호텔 대귀빈실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서를 접견하자 조선에서 온 보빙사 일행은 갑자기 큰절을 올렸다. 도포를 차려입은 이국의 친선사절이 마룻바닥에 엎드리는 모습에 악수나 청하려던 미국 대통령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조선이 미국과 안면을 트는 과정은 이처럼 진풍경의 연속이었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등 국민드라마를 써온 김은숙 작가가 이번에는 구한말 개화기로 들어가 신작 ‘미스터 션샤인’을 선보인다. 신미양요(1871) 때 군함을 타고 미국에 간 소년이 훗날 미군 신분으로 조선에 돌아와 펼치는 판타지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상상 속 캐릭터지만 미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한국인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미국을 오간 최초의 한국인은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올린 보빙사였다. ‘보빙사(報聘使)’는 ‘답례로 외국을 방문한 사절’을 뜻한다. 조선 국왕 고종은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20대 젊은 관료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미국에 보냈다. 양국이 수교하여 미국 정부가 공사를 파견한 데 대한 국가 차원의 답례였다.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서구 국가들 가운데 첫 번째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이 일순위였을까?

1866년 평양감사 박규수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난동을 부린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버렸다.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켜 양국 군대가 강화도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다. 섭정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게 하고 나라의 문을 닫아걸었다. 조선으로선 첫 인상이 험악했던 미국이다.

하지만 1880년대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아버지를 제치고 친정에 나선 고종은 외세의 통상 요구와 침략 야욕에 흔들렸다. 일본과는 희대의 불평등조약(조일수호조규)을 맺었다. 대국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탈로 영토를 할양하기 일쑤였다.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댔다. 불안한 임금은 기댈 언덕을 찾았다.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양대인(洋大人)이다.”
고종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키워나갔다. 1880년 여름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이 건넨 ‘조선책략’을 갖고 돌아왔다.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세력균형’을 이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은 그 균형추로 미국을 떠올렸다. 그는 ‘양대인’이 중재자가 돼주기를 바랐다.

한편 그 무렵 미국도 조선의 문을 열려고 했다. 해군 제독 로버트 슈펠트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조선과의 수교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1879년 유구국(오키나와)을 합병해 청나라를 자극했다. 그는 미국을 끌어들여 견제하고자 이 요청에 협조했다.

수교 협상은 미국과 청나라의 회담으로 진행되었다. 당사자인 조선을 쏙 빼놓은 기이한 협상이었다. 1881년 고종에게 대리 협상을 위임받은 이홍장은 조문에다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점을 못 박으려고 했다. 슈펠트의 거부로 조문 명시는 무산됐지만, 이홍장은 어떤 식으로든 종주국 지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결국 이 부분은 고종이 미국 정부에 보내는 서신에 따로 밝히기로 했고, 협상은 1882년 4월에 최종 합의가 이뤄졌다.

“타국이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일차 조지(照知)를 거친 뒤에 필수상조(相助)하여 잘 조처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한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나오는, 고종이 꿈꾸던 조항이다. ‘일방이 제3국에 의해 강압적 대우를 받을 때 다른 일방은 중재를 한다’는 뜻. 치외법권 허용, 최혜국 대우 등 실질적인 문제점이 수두룩한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불안감을 덜어주는 이 추상적인 조항에 기뻐했다. 이듬해 미국이 중국, 일본과 동급인 전권공사를 파견하자 그의 기쁨은 곱절이 되었다.

1883년 7월 15일 고종의 명을 받은 보빙사 일행이 제물포에서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군함 모노카시호에 올라탔다. 24살의 정사 민영익, 29살의 부사 홍영식, 25살의 종사관 서광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청년들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큰절을 하고 산업박람회, 병원, 전신회사, 제당공장, 해군기지 등을 시찰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미국에 이어 유럽까지 둘러보고 이듬해 5월 귀국한 민영익의 소감이다. 하지만 조선이 흥분한 것과 달리 미국은 냉정했다. 미국이 조선과 수교한 목적은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해외시장을 개척해 경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초대 미국 공사 루시우스 푸트가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은 국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에 굴종하여 단물 빠진 껌과 같다. 수출 가능 물품도 소가죽, 쌀, 사람 머리털, 전복껍데기 등에 불과하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1884년 7월부터 조선의 전권공사 자리는 변리공사 겸 총영사로 낮춰졌다. 서울 이외 지역에는 영사관조차 설치하지 않았다. 고종의 기대와 달리 중재는커녕 조선에 대한 관심을 줄였다. 미국은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세력균형을 잡아주는 ‘양대인’도, 광명세계의 밝은 햇살을 비춰주는 ‘미스터 션샤인’도 아니었다.

1905년 7월 미국의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은 일본에서 가쓰라 다로 총리와 비밀협약을 맺었다. 1924년에야 밝혀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를 범하지 않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다’는 이 뒷거래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효력을 잃었다. 말뿐인 우의가 무너진 자리엔 망국의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6월 15일 (17:58)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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