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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하는 조선! ‘아무개’는 왜 의병이 되었나

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86 – 구한말 의병 : 독립전쟁의 서막을 올리다

사극속 역사인물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입력 : 2018.06.30 07:19|조회 : 8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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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하는 조선! ‘아무개’는 왜 의병이 되었나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義兵)이다.”

1896년 1월 조선이 음력 대신 양력을 도입하며 시간의 흐름이 요동친 그때, 역사의 대전환기를 비집고 이 땅의 아무개들이 들고 일어났다. 전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해 등장한 의병이 본격적으로 항쟁에 돌입한 것이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바로 그 구한말 의병을 망각의 세월 속에서 끄집어내겠다고 예고한다.

의병은 반복되는 역사의 소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조선 팔도에서 떨쳐 일어선 의병이 왜적의 보급로를 끊고 요충지 진격을 저지하여 국난을 극복했다. 그 소중한 역사적 경험이, 잊을 수 없는 승리의 기억이 망국의 기로에 선 구한말에 되살아났다. 청나라와 싸워 이기고 이 땅을 지배하려는 일제의 앞길을 아무개들이 가로막은 것이다.

구한말 의병의 구심점은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건 유생들이었다. 그들은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외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했다. 급기야 국모가 침략자의 사주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고, 친일내각이 단발령으로 정신을 말살하려 하자 울분이 폭발하고 말았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을미의병(乙未義兵)’이 일어났다.

그런데 의병의 창의진(倡義陳)에 몰려드는 병력은 이름 없는 아무개들이었다. 1894년 ‘보국안민(輔國安民 : 나랏일을 돕고 만백성을 편안케 함)’ 기치를 높이 들고 들불처럼 번진 동학농민전쟁이 또 다른 모습으로 재현된 것이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 왜적과 서양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거병함)’가 살길이라며 일제와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이 돌아온 것이다.

의병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는 각지의 관공서를 습격했다. 유인석과 그의 문인들이 제천에서 일으킨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이 대표적이다. 이 부대는 충주부를 함락시키고 충청도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했다. 유인석은 격문을 발표하여 관리들이 친일 행각을 중단하고 의병과 함께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일제의 섬뜩한 위협 속에 나라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고 친일내각을 갈아엎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고종과 친러파는 김홍집, 어윤중 등 갑오개혁을 추진해온 관료들을 역적으로 지목해 희생양으로 삼았다. 또 단발령을 철폐하고 밀린 세금을 탕감하여 의병의 해산을 유도했다.

대다수 의병장들은 이 회유책을 받아들이며 휘하 부대를 자진해서 해산했다. 충청도의 유인석, 강원도의 민용호 등이 이끌던 병력은 거부하고 만주로 이동했지만 청나라의 체류 금지로 자의반 타의반 흩어졌다. 을미의병 항쟁은 그렇게 갈무리되었다.

그러나 의병을 부르는 격변의 소용돌이는 나날이 거세졌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발 딛는 1900년대 초에 이르면 조선의 운명이 벼랑 끝에 내몰린다. 한반도 패권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된 고종은 무기력했다. 이 나라가 변화하는 것인지 망해가는 것인지, 사람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희망은 오직 의병이었다. 시대는 거국적인 항쟁을 촉구하고 있었다. 의병의 저변이 유생에서 하층민으로 확산되며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영덕에서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이 부대를 조직했다. ‘활빈당(活貧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의적단도 함께 했다. 유생이든, 농민이든, 유민이든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을 거는 충정은 다르지 않았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빼앗았다. 온 나라가 분노와 슬픔에 잠긴 가운데 ‘을사의병(乙巳義兵)’이 총칼을 들었다.

전직 관료 최익현은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체포되어 대마도로 끌려간 그는 왜놈들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태백산 호랑이’, ‘돌돌이 장군’이라고 불린 신돌석은 경상도와 강원도를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의 부대는 1908년까지 끈질기게 일본 군경을 괴롭혔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은 을사의병의 불길이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 것이다. 정식군대가 합류하고 신식무기를 보강하자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1907년 11월 전국의 의병 부대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해 ‘13도 창의군’을 편성했다. 24개 진, 1만 명의 대군이었다. 13도 창의군은 이인영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이듬해 1월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육박했다. 선발대는 혈전을 벌였지만 후속부대가 제때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물러서야 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도 실패로 돌아갔다.

정미의병 항쟁은 이후 일본군의 파상 공세에 밀려 잦아들었다. 일제는 의병의 씨를 말리겠다며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에 들어갔다. 사람을 총살하고 목 베는 것도 모자라 유해를 가마솥에 삶는 만행이 벌어졌다. 처참하고 잔혹한 살육이었다.

하지만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이어진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국경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펼쳐온 안중근은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살아남은 의병 부대들도 간도와 연해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의 터전을 일궜다.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의 서막을 올린 것이다.

낯선 들과 산에서 피 흘리며 쓰러져간, 아름답고 쓸쓸한 아무개의 죽음에 오늘날 한국인은 빚을 지고 산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주고 싶지만 알 길 없는, 그래서 더 가슴에 사무치는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 의병! 망각의 터널을 지나 지금 그들이 돌아온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 이 기사는 빠르고 깊이있는 분석정보를 전하는 VIP 머니투데이(vip.mt.co.kr)에 2018년 6월 29일 (19:19)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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